아날로그 시대는 끝났다? 카시오의 부활을 보라

입력 2019.10.11 03:00 | 수정 2019.10.11 20:59

계산기 제왕 카시오 '스마트한 변신'

이미지 크게보기
①카시오 간판 시계 제품 지샥(G-SHOCK). 충격에 강한 내구성과 다양한 기능으로 고급 캐주얼 시계 시장을 사로잡았다. ②현 가시오 가즈히로 사장. ③카시오 함수계산기. 미적분 등 특수 계산이 가능해 교육용으로 인기가 높다. /블룸버그·카시오
미국 유명 패션잡지 GQ가 얼마 전 고급 캐주얼 시계 부문 최강자로 일본 전자기업 카시오가 생산하는 지샥(G-SHOCK)을 꼽았다. 전자계산기 명가로 잘 알려진 그 카시오(CASIO)다. 지샥은 카시오가 1983년 내놓은 야심작. 지샥이 대박을 치면서 카시오는 사실상 세이코·시티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계 제조업체로 변신한 상태다. 전체 매출 중 시계 비중이 50%를 넘는다. 지난해 시계 부문 매출은 1718억엔(약 1조9200억원)을 기록했다.

카시오는 2000년대까지 전자계산기와 디지털카메라가 주력이었다. 그러나 스마트폰 확산으로 두 분야 모두 침체를 겪으면서 매출이 2006년 6231억엔에서 2010년 3400억엔까지 급락했다. 그런 가운데 지샥이 탄탄하게 성장을 이어가면서 부진을 만회하고 있다.

스포츠용 시계에 집중한 역발상

지샥은 1981년 사내 한 엔지니어가 '떨어뜨려도 망가지지 않는 시계'라는 아이디어를 내면서 탄생했다. 당시 시계 시장은 '더 얇고 더 가볍게'라는 구호가 유행을 탔으나 지샥은 역발상으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지샥의 품질은 1980년대부터 쌓아온 '중공(中空)구조' 기술 덕분이다. 중공구조는 고무공에서 힌트를 얻은 설계 방법으로 시계 심장부인 정밀 모듈을 작은 점 몇 개로 본체와 연결, 사실상 내부 공간에 떠 있게 하는 기술이다. 외부 충격을 강력하게 흡수할 수 있어 충격이 가해지면 시계가 쉽게 고장 나는 불편을 극소화했다. 특히 충돌이 잦은 스포츠업계에서 지샥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4년 미국 한 TV 프로그램에서 트럭으로 지샥을 깔고 지나가는 실험을 벌였는데, 결과는 놀랍게도 기능에 지장이 없었다. 이후 극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소방관이나 아웃도어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지샥은 판매량을 늘려갔다.

이후 카시오는 지샥의 내구성을 더 강화, 땀에 의한 마모, 낙하와 망치 치기 같은 강력한 충격, 전압과 원심력, 50m 수심 방수까지 '특수 시계'라는 이미지를 구축해갔다. 기능도 다양화, 등산 고도와 나침반, 온도 측정센서를 장착한 시계를 내놓는가 하면, 2016년에는 터치스크린에 구글 달력과 위치표시 기능을 추가한 등산용 시계 프로트렉(Pro-Trek)도 출시했다. 낚시꾼이 낚시 장소를 기록하고 어획량까지 확인할 수 있게 만든 시계도 있고, 하이킹과 조깅, 사이클링, 카약, 골프 등 종목별로 특화한 제품을 줄줄이 선보였다. 지샥은 기능에 따라 싼 건 100달러 정도지만 비싼 건 7400달러나 한다. 200여 종이 나와 있다.

연 950만개 판매…80%는 해외

지샥은 지난해 카시오 전체 매출의 30%, 영업이익의 20%를 벌어들이는 간판 제품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 판매 대수는 950만대. 14년 연속 증가세다. 그중 해외 판매가 80%를 웃돈다. 해외 공략 핵심 기법 중 하나는 적극적인 홍보 행사다. 2008년 공연처럼 꾸민 홍보행사 '샥 더 월드'는 지샥을 개발한 이베 기쿠오 고문 엔지니어가 직접 세계 각지를 돌면서 지샥의 성능과 스토리를 알리고 있다. 백화점과 가전 양판점에서도 수시로 홍보 행사를 갖고 있으며 2013년 유명 가수 에미넘과 협업한 시계를 내놓기도 했다. 주로 플라스틱 프레임을 쓰는 지샥의 자매 브랜드로 고급스러운 느낌을 강조한 메탈 시계도 출시했다. 해외 보석 전문점 판로를 적극 개척하고 있으며 3년 후 지샥 메탈 매출을 두 배 늘린다는 포부다.

최근 시계 시장이 스마트워치를 중심으로 활동량을 측정해주는 핏빗(fitbit)과 조깅족에게 인기를 끄는 가민(garmin)까지 분화하고 있다는 점도 카시오엔 새로운 도전이다. 카시오는 성능만으로 승부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브랜드 이미지 구축에도 집중하고 있다. 마쓰다 유이치 카시오 전무는 "기능으로 제품을 차별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브랜드 경쟁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시오의 전자사전 ‘Ex-word’시리즈. /카시오
계산기 사업은 교육시장에 집중

카시오의 오랜 핵심 사업인 계산기는 교육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새롭게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미적분과 삼각함수 등 특수계산이 가능한 함수 계산기다. 가격도 일반 계산기보다 최고 수십 배 비싼 제품이다. 연간 2500만대가 팔려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하는 교육사업 중 함수 계산기 단일 품목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

함수 계산기는 유럽과 미국, 동남아시아에서 인기를 끈다. 서구 국가 대부분이 중·고교와 대학 입시에 함수 계산기 사용을 허용하고 있으며, 수학 교육을 강화하는 동남아에서도 함수 계산기가 히트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베트남에서는 2001년 공립학교 입시에 함수 계산기 사용을 허가하면서 연 120만대가 팔렸다. 카시오는 지난해 10월 필리핀에서 중·고교 판매용으로 함수 계산기와 교재를 묶어 '교실키트' 상품을 내놓기도 했다. 현지 시장 개척을 위해 지난해 9월 인도네시아 교육문화부와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교육 분야에서 파트너십 계약을 했고, 학교 전문 브랜드 '가쿠한(GAKUHAN)'을 선보였다. 고령층을 위해 글씨를 크게 키운 특수 전자사전도 출시하면서 교육시장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호황 때 구조조정…새 시장도 개척

카시오는 1995년 세계 최초로 액정화면이 달린 디지털카메라를 출시해 2000년대까지 캐논·소니와 함께 '디지털카메라 3인방'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디지털카메라 시장이 급속하게 가라앉자 카시오의 디지털카메라 부문은 2017년 49억엔 영업적자에 빠졌다. 결국 가시오 사장은 지난해 5월 디지털카메라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이미 2010년에도 액정과 휴대전화 단말기사업을 NEC 등에 매각한 이후 두 번째 대규모 구조조정이었다.

시계와 계산기 사업이 잠시 반짝하곤 있지만 위기 대응은 항상 이뤄지고 있다.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기업 존속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올 1월 창업 이래 처음으로 희망 퇴직자를 모집했고, 45년간 참가했던 CES(세계가전전시회)는 올해부터 참가를 중단했다. 신제품을 소개하는 보여주기식 경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시오 사장은 "시계와 계산기 사업에서 안정된 수익을 확보할 수 있을 때 조직을 재정비해 다음 수익원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면서 "위기에 처했을 때 승부 방식을 바꾸는 게 카시오의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카시오는 구조조정과 더불어 새로운 시장 개척에도 나서고 있다. 올 초 카메라 광학기술과 연사 기능(연속 사진 촬영 기술)을 활용한 의료용 카메라를 출시했다. 스포츠용품업체 아식스와 손잡고 신개념 조깅화 설루션 서비스를 올해 안에 출시할 계획이다. 카시오에서 조깅족들 주법(走法)을 센서로 분석하면 아식스가 최적 운동화와 달리는 법을 안내한다. 카시오 기술은 중국 화웨이 스마트폰에도 채택됐다. 신규 사업을 총괄하는 이노구치 도시유키 카시오 전무는 "카시오의 미래 비전은 다재다능형 기업보다 유연한 기업"이라면서 "기술을 살려 외부와 언제든지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카시오 공동창업자 가시오(樫尾)가문 4형제. /블룸버그·카시오
1957년 4형제가 창업… 27년 만에 세대 교체

전자계산기의 아이콘인 카시오는 1957년 도쿄 가시오(樫尾)가 4형제(다다오·도시오·가즈오·유키오)가 설립했다. 2015년 4대 사장으로 취임한 가시오 가즈히로(樫尾和宏·53)는 전 사장 가시오 가즈오의 장남이다. 27년 만에 이뤄진 세대교체였다. 가시오 사장에겐 디지털카메라 사업 침체 후유증을 추스르면서 시계 등 주력 사업에서 수익을 재창출해야 하는 힘든 임무가 주어졌다.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카시오가) 시계 사업 의존에서 벗어나 신규 사업을 육성하는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시오 사장이 취임하던 2015년 카시오는 최고 순이익(311억엔)을 기록하면서 실적 회복에 대한 자신감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는 카시오가 ‘대기업병’에 빠졌다고 진단하면서 강한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60여년 동안 바뀌지 않는 경영 수장 카리스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톱다운(TOP-DOWN)’ 경영 방식에 손을 댔다. 조직 개편을 통해 직원들의 자유로운 연구 풍토를 되살리는 일을 중점 과제로 삼았다. 그동안 카시오는 직원들의 다양한 사업 부서 간 이동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퇴직할 때까지 전자 악기 한 제품만 담당한 직원도 있었다.

가시오 사장은 지난해 4월 시계와 교육 기기 등 사업별로 흩어져 있던 제품 개발을 하나로 통합하는 ‘개발본부’를 직접 진두지휘해 신설했다. 제품별로 디자인과 설계 등을 따로 진행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하무라기술센터에서 다양한 분야 엔지니어가 모여 아이디어를 나누고 제품을 기획한다. 호조 요시하루 기획추진부장은 “다양한 부서 지인이 늘어나면서 기술 자문을 할 수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면서 사업부 통합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성과도 나타났다. 올해 초 출시한 의료용 카메라는 성공 사례 1호다.

EMS(위탁제조서비스)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 줄여나갔다. 비용 절감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2005~2010년 카시오 제품의 중국 등에서 들여오는 EMS 비율이 최고 70%에 달했다. 2016년엔 일부 EMS 생산 제품이 품질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납기를 제때 맞추지 못하는 사태까지 생겨났다. 품질을 강화하기 위해 가시오 사장은 시계 생산 거점인 야마가타공장에서 카시오 전 제품을 일부씩 생산하도록 바꿨다. 공장에는 본사 제품 담당자도 상주시켰다. 가시오 사장은 “고인물은 썩기 마련인데 다시 한 번 카시오를 창업한다는 각오로 조직을 살펴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Case Study

더보기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