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폰은 왜 실패했을까? 노인만을 위한 市場은 없다

입력 2019.09.06 03:00 | 수정 2019.10.11 21:13

[Cover Story] 초고령화 시장 공략 이렇게 하라
MIT 에이지랩 조셉 코글린 소장 인터뷰

한때 '효도폰'이라 해서 노인들을 위해 기능을 단순화하고 버튼을 크고 투박하게 만든 전화기가 시중에 봇물처럼 쏟아진 적이 있었다. 한국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그랬다. 떨어뜨려도 쉽게 깨지지 않도록 단단한 특징도 있었다. 그런데 시장에선 외면했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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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코글린 MIT 에이지랩 소장이 고령사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위재 기자
노인 전용 간편식을 만들려는 시도는 1955년 미국에서도 있었다. 거대 식품 기업 하인즈가 뛰어들었다. 10년간 심혈을 기울인 연구개발 끝에 내놓은 노인용 통조림은 쇠고기·양고기·닭고기 죽 형태로 싸고 먹기 편한 요소에 중점을 뒀다. 그런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전문가들은 이런 실패작들이 노인들 정서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노인들은 이런 효도폰이나 노인용 통조림을 장바구니에 담는 순간, 스스로를 '저는 늙고 가난하고 눈도 어둡고 이도 성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듯한 굴욕감을 느낀다는 얘기다. 미국 자동차업계에선 오랜 금언이 내려온다. "젊은이가 타는 차를 노인에게 팔 수는 있어도 노인이 타는 차를 젊은이에게 팔 수 없다." 노인만을 위한 제품이 가진 한계를 묘사한 말이다.

노년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

MIT 에이지랩 조셉 코글린 소장 인터뷰
조셉 F 코글린(Coughlin·58) MIT 에이지랩(Age Lab) 소장은 "그릇된 '노령 담론(narrative of aging)', 노인은 약하고 둔하고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없어 타인이 베푸는 후의(厚意)에 기대서 사는 존재라는 고정관념은 종종 기업들을 오판으로 이끈다"고 강조했다. 고령 인구는 미래 소비 시장 주체다. 미국에서 50세 이상이 소비하는 규모는 5조6000억달러(2015년 기준)로 50세 이하 4조9000억달러보다 많았다. 한 나라 경제를 좌우할 만한 대규모 소비자 집단인 셈이다. 이들이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를 기업이 더 연구해야 하는 이유다. 중요한 건 늙어갈수록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을 경험하고 실천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에이지랩은 MIT 슬론 경영대학원 바로 옆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분주한 연구원들 사이로 코글린 소장이 산뜻한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반갑게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언젠가 우연히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고 모임에 갔는데 반응이 좋았고 나중에도 다들 기억하길래 아예 그때부터 트레이드마크처럼 갖춘다"고 말했다.

에이지랩은 이른바 '장수 경제(Longevity Economy)'를 연구하는 조직이다. 50세 이상 인구를 위한 기술과 디자인에 중점을 둔다. 1999년 설립됐다. 코글린 소장이 20년간 다양한 정부, 기업, 비영리·시민 단체들과 협업하면서 내린 결론은 특별한 게 아니다. 노인 역시 젊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인정받고 다양한 생리적·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길 원한다는 것. 앞으로 고령 사회 핵심 세력으로 자리매김할 베이비붐 세대는 인터넷과 컴퓨터에 익숙하고 풍요 사회를 경험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나서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코글린 소장은 "노인은 '환자'가 아니라 '소비자'"라면서 "기업은 노년을 여생(餘生)이 아닌 새로운 삶의 단계가 시작하는 시기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퇴하고 신체적으로 불편한 시기로 접어든다는 선입관을 탈피하라는 충고다. "노년기는 인생에서 3분의 1을 차지하는 기간입니다. 단지 죽기 전에 남아있는 시간이 더 이상 아닌 거죠."

'공감'에 기반한 '초월적 디자인'

MIT 에이지랩 조셉 코글린 소장 인터뷰
에이지랩 연구원들이 노인 환경 체험을 위해 특수 제작한 의류 아그네스(AGNES)를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 에이지랩
스마트폰은 손놀림으로 글자나 아이콘 크기를 확대하고 줄일 수 있다. 시력이 나빠진 노인들에게도 반갑고 뿌듯한 제품이다. 반면 여전히 '노인폰'이라 해서 버튼을 3개만 단 휴대전화가 버젓이 출시된다. 집, 병원, 119. 잘못된 노령 담론이 빚은 참사다. 코글린 소장은 "노인을 배려한답시고 단순화하거나 노골적으로 배려한다는 인상을 풍기면 곤란하다"면서 "상품이 편리할 거란 기대감을 주면서 즐겁게 쓸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그는 '초월적 디자인(transcendent design)'으로 부른다. 나이가 들면 신체적으로 퇴화하는 건 분명하지만 노인들이 그런 측면에만 집착해서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교훈을 담았다. 초월적 디자인에 가깝게 가기 위해서 연구자나 상품 개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철저한 공감(radical empathy)'이다. 이 공감력을 높이기 위해 에이지랩에서 벌인 실험은 '아그네스(AGNES)'로 명명한 특수 의류 체험. 'Age Gain Now Empathy System'의 약자로 시야를 제한한 안경, 몸을 뻑뻑하고 움직이기 힘들게 한 장갑·허리띠·무릎 보호대, 걷기 불편하게 한 신발 등까지 노인 신체 여건을 재현했다. 연구원들이 아그네스를 입고 거리와 상점을 돌아다니며 노인들이 실제 일상생활에서 어떤 불편을 느끼는지 간접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실험 결과를 통해 편의점 CVS는 그동안 무거운 제품은 옮기다 떨어져 부서질 걸 우려해 대부분 낮은 선반에 뒀는데, 노인들에겐 이게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허리 높이로 이동시켰다. 표지판이나 통로도 개선했다.

기술 혁신도 중요하다. 최첨단 기술을 반영한 제품은 건강이나 안전 같은 노인 관심사를 다룰 때도 취약 계층이란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노인들을 위한 '파괴적 혁신'이 뭔지를 찾아야 한다.

주방용품 회사 옥소(OXO)가 오래전 개발한 감자 깎는 칼은 타원형 특대 손잡이가 특징이다. 이는 창업자가 관절염에 시달리던 아내가 요리할 때 감자 깎는 칼이 가늘고 미끄러운 원통형이라 번번이 놓치는 걸 바라보다 직접 디자이너를 데려다 실험을 거친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당시 개발팀은 장갑을 끼고 마디마다 테이프를 감은 상태에서 저녁 요리를 준비했다. 기존 요리 도구로는 정상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불편했다. 이런 '철저한 공감'을 통한 접근이 이후 '파괴적 혁신'을 반영한 옥소 주방용품 신화를 낳은 원동력이었다.

'누가 소비 지출을 주도하는가' 잘 살펴야

기업은 고령 사회 '선도적 사용자(lead user)'를 잘 파악해야 한다. 누가 소비 지출을 주도하는가. 코글린 소장이 지목한 건 '고령 여성'이다. 고령 여성은 세대를 넘어 소비를 주도할 뿐 아니라 노인 간병을 담당하는 주체다. 고령에서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남성보다 빠른 상승세를 보인다. 에이지랩 연구에 따르면 고령 남성은 노후에 대해 낙관적이고 막연하지만 여성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계획한다. 기업이 왜 여성을 기본값으로 놓고 상품 개발에 들어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결과다. 코글린 소장은 "장수 경제에 기업이 안착하려면 부정확한 직감을 따르지 말고 이 '선도적 사용자'를 철저히 연구 분석해야 한다"면서 "빠르면 10년 안에 장수 경제 시장이 무르익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코글린 소장이 40대로 접어든 세대에게 고령 사회를 준비해야 할 결정적 전환점으로 권하는 나이는 45세다. 그 나이쯤엔 건강검진에서 의사가 다 비슷하게 진단한다. "별 이상은 없는데 평소 운동도 하고 건강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그 이후 '노인 생활'을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낭패를 겪을 수 있다. "노년을 위한 투자는 다양합니다. 돈은 물론이고, 교육, 건강, 친구, 모두 관리 대상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죠. 그 사회적 연결망(social connection)을 유지하지 못하면 불행한 노후를 보내기 십상입니다. 의술 발전으로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 이제 어느 정도 두려움이 해소됐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제 과제는 오래오래 잘 사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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