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퇴는 옛말, 땀 흘리는 노인들 가득한데 사업 기회도 넘친다"

입력 2019.09.06 03:00 | 수정 2019.09.13 16:45

[Cover Story] 초고령화 시장 공략 이렇게 하라
영국 옥스퍼드 대학 고령화 연구소 조지 리슨 소장 인터뷰

영국 옥스퍼드 대학 고령화 연구소 조지 리슨 소장 인터뷰
'고령 인구가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나자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재정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낸다. 세금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퇴직연금과 의료혜택이 대폭 줄어든다. 반발한 젊은 경제활동인구는 짐을 싸서 해외로 나간다. 세수가 줄어들고 국력이 약해지면서 정부 부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난다. 정치 불안과 실업, 노동쟁의, 사상 최고의 이자율, 붕괴된 금융 시장에 국민은 신음한다.

로런스 커틀리프 미국 보스턴대 교수는 2003년 저서 '다가올 세대의 거대한 폭풍'에서 인구통계학적, 거시경제학적 자료를 근거로 2030년 미국 경제의 상황을 이렇게 치밀하게 예측했다. 전쟁이나 허리케인처럼 물리적 힘이 작용하는 재앙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고령화가 건물 대신 경제 근간을 무너뜨리는 종말의 동기가 될 수도 있다는 암시다. 그간 고령화를 대하는 기업의 태도도 이런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유엔(UN) 경제사회사무국은 2050년이 되면 전 세계 60세 이상 인구수가 14세 미만 인구수를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한다. 고령 인구가 젊은 인구보다 많은 적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불안정성을 꺼리는 경제계에서도 고령화를 기회 이전에 위기로 보는 시선이 팽배하다.

고령화, 부작용보다 긍정 효과 많다

조지 리슨(Leeson) 영국 옥스퍼드 대학 부설 고령화 연구소 소장은 이런 시선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어 주목받았다. 그는 "고령화 현상은 정부나 언론의 우려와 달리 부작용보다 순효과가 많다"며 "고령화 사회를 잿빛으로 그리는 예측은 터무니없이 과장됐다"고 말했다. 노화라는 인생 경로를 경제활동이 끝나는 시기가 아니라, 경제활동이 지속 가능한 시기로 본다면 고령화 현상은 오히려 탈출구와 새 시장을 찾는 기업에 경제성장과 부를 쌓을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유엔 전망치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 세계 60세 이상 인구는 10억명 정도에 다다를 것으로 보인다. 리슨 소장은 "이전에 없던 취향과 기호를 가진 10억명의 소비 수요에 기업이 발맞추기 시작하면 지금보다 생산적인 일자리, 제품, 서비스가 창출될 것"이라며 "임금과 기업 구조,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 경제 발전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지 못했던 문제점 전반에 걸친 체질 개선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옥스퍼드 대학 부설 고령화 연구소는 세계의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연령대가 높은 유럽권에서도 고령화 연구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이다. 리슨 소장은 더운 여름 날씨였음에도 구김 없이 반듯한 갈색 재킷을 입고 먼저 악수를 청했다. 내민 손목 사이로 보라색 시곗줄과 애플의 최신 스마트워치가 보였다. 그는 "고령화 연구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곧 글래스턴베리"라고 말했다. 글래스턴베리는 매년 여름 영국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음악 축제다. 영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축제 기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옥스퍼드를 찾은 기자에게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하는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고 넌지시 말한 셈이다.

70~80대에도 일하는 영국 노인들

유럽연합은 전통적으로 경제 정책과 사회 정책 부문에서 고령 친화적 입장을 취해왔다. 영국이 G8(주요 8개국) 의장국을 맡은 2013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더 늦기 전에 알츠하이머병 확산을 막기 위해 전 세계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호소한 이론적 배경도 이 연구소에서 나왔다. 리슨 소장은 "우리의 역할은 신체적인 문제부터 퇴직연금 재정 마련 같은 사회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노화가 낳는 다양한 과제를 건설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인생 후반을 충만하게 살려는 노인들의 노력이 사회에도 유례없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국은 2011년까지 높은 수준의 보건·복지를 통한 높은 기대수명, 낮은 영아 사망률 현상이 유지되는 전형적인 선진국형 고령화 현상을 호되게 겪었다. 노인들에게 연금은 먹고살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정년퇴직할 나이'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평생 일해야만 하는 사회가 되면서 노인들은 자연히 바깥으로 나섰다. 주어진 일이라면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옥스퍼드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65세가 넘는 영국인 중 건설 현장에서 힘들고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인구가 8%에 달한다. 1990년대 영국의 수퍼마켓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지금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주로 10대 후반이나 대학을 다닐 나이 정도의 젊은 층이었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70대들이 선반에 물건을 진열하거나 계산대를 지킨다.

"최근 10년 사이 영국에서는 육체적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거라 여겨졌던 70대 혹은 80대까지 자연스럽게 일을 합니다. 일을 마친 후에는 20대처럼 신나게 사교를 즐기며 노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해졌죠. 영국 노인들은 대체로 활동적인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느긋한 여가, 고독 그리고 '은퇴' 같은 단어는 요즘 60대나 70대에게 이제 금기어가 된 거죠. 오후 4시쯤 도로나 공원에 나가보면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노인, 플라스틱 원반을 던지거나 테니스 연습을 하며 땀 흘리는 노인들로 가득합니다. 이전에 통용되던 약하고 무기력하며, 보호받아야 하는 '노년'이란 개념은 이제 영국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이 차별하는 용어 쓰면 실패

연금만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노인들이 이전과 다름없이 일하면서 경제력을 갖추고, 사회적인 관계망을 유지하자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고령 소비자층을 위한 제품이라고 하면 늙고 아프고 불편한 데 따른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제품에 치중되는 경우가 많았다. 휠체어나 지팡이, 목욕 보조용품이 태반이었고 여기에 건강 보조식품이나 장례품목이 더해지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생 경험이 두루 축적된 고령 인구는 결코 만만한 소비자층이 아니었다. 단순히 아이디어만 더한 상품이나 편의성을 높이기만 해서는 팔리질 않았다.

리슨 소장은 "극적인 시대 변화를 겪으며 살아온 베이비붐 세대 출신 노령 인구층이 이전처럼 먹고사는 것 자체를 최우선으로 지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판"이었다며 "유럽 고령화 시장을 공략하려는 기업들은 젊은이들처럼 세분화되고 다양한 소비 의욕을 가진 노년층 소비자를 겨냥한 주도면밀한 전략을 짜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국 기업들은 나이 차별적이고 구시대적인 메시지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고령 직원을 제품 기획,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투입해 이들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노인들이 참여하는 테스트 그룹을 통해 제품과 서비스를 출시하기 전에 테스트하며 노인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 대신 현실적인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 글로벌 스킨케어 브랜드 도브는 '나이 듦은 아름답다'는 프로에이(Pro-Age)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펼쳐 유럽 시장 점유율을 대폭 늘렸다. 프랑스 요구르트 브랜드 다농은 액티비아 요구르트 마케팅을 하면서 소화 건강이라는 보편적 이슈에 중점을 뒀다. 2017년 얼루어 매거진은 스킨케어나 메이크업 관련 서술을 할 때 '안티에이징'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선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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