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가 오랫동안 범람하지 않을 때 북방족 말발굽 소리가 커진다'

    •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입력 2019.08.23 03:00 | 수정 2019.08.24 22:14

[홍춘욱의 경제사 여행] (2) 북방민족 지배받은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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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민족의 중국 대륙 침공을 가능하게 한 군사 기술의 하나로 거론되는 말의 등자. 그러나 최근 연구는 기후 변화가 더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 게티이미지 코리아
한국 등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삼국지(三國志)'만큼 영향을 준 소설은 없을 것이다. 한(漢)나라 말기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정치가 엉망진창이 된 가운데 황건적의 난을 고비로 '난세'가 시작되고, 이 과정에서 조조와 손권, 그리고 유비가 천하 패권을 노리며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는 과정은 수많은 사람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 않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삼국지'의 주인공이었던 유비, 관우, 장비, 이 3형제가 차례로 목숨을 잃고, 홀로 남은 제갈공명이 북벌 도중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나아가 삼국 통일 이후, 5개 북방민족(五胡)의 침략으로 양쯔강 이북의 땅을 빼앗긴 것도 이 시기에 대한 관심을 낮추는 원인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삼국시대 당시 각국은 적게는 수만, 많게는 십수만의 병력을 동원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런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西晉)는 북방 민족에게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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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기술 혁신이 원인일까

일부 역사가들은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나라가 지방에 분봉한 왕족들이 후계 문제를 들어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팔왕의 난(八王之亂)' 등으로 분열된 상태였고, 여기에 대단히 무능한 황제가 연이어 제위에 오른 것이 패망의 이유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중국 역대 왕조 중 청나라 정도를 제외하면 어리석은 황제가 나라를 말아먹는 일은 빈번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대규모 농민 반란 한번 겪지 않은 왕조도 있었던가? 그런데 왜 유독 진나라 이후 당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는 내내 밀리기만 했을까?

이에 대해 '군사적 혁신' 때문에 한족이 세운 나라가 밀리게 되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즉 등자(鐙子·Stirrup) 등 강력한 군사적 혁신 덕분에 한족 왕조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등자란 말 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를 의미한다. 등자는 말에 오르거나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는 데 매우 유용한 발명품으로, 등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기마병의 주된 무기는 활이었다. 즉, 기동력을 이용해 상대에게 화살 공격을 한 다음 후퇴하는 게 일반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등자의 발명 이후 긴 창을 활용한 돌격전법이 기병의 전투 방법으로 바뀌게 된다. 실제로 8세기경 서양에 등자가 전해진 이후 기사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가 정착되었음을 감안할 때, '등자로 인해 북방 유목민족이 우위를 점했다'는 분석은 꽤 그럴듯하다. 그런데 중국 문헌에 등자가 처음 실린 것이 477년이니, 삼국시대(3세기 초)에는 북방 민족이 강력한 군사적 우위를 가지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조 때 위나라는 소수의 원정부대만으로 선비족을 쳐부순 바 있다.

가뭄 등 기후변화가 영향 미쳤다

그럼 어떤 요인이 북방 유목민족의 득세를 불러왔을까? 오랫동안 이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발간된 흥미로운 논문 한 편 덕분에 의문을 대부분 풀 수 있었다. 잉바이(Ying Bai)를 비롯한 논문 저자들은 다른 어떤 변수보다 강우량의 변화가 중국과 북방민족의 갈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지리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중국을 대표하는 거대한 강, 황하는 아시아 내륙에서 발원해 황토고원을 향해 북쪽으로 흘러간다. 이 과정에서 황하는 연간 15억 톤 이상에 이르는 흙을 흡수함으로써, 황하(黃河)라는 말 그대로 노란색의 흙탕으로 변한다. 황토고원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던 황하는 타이항산맥에 부딪혀 다시 남쪽으로 흘러가며 한족의 모태가 되는 비옥한 평야를 만든다.

잉바이를 비롯한 논문 저자들은 중국 문헌 기록에 주목했다. 즉, 황토 고원을 지나면서 하류로 토사를 실어 나르다 보니 과거 중국 정부는 늘 홍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주변 평야보다 황하 강바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거대한 둑을 건설하고 또 다양한 지류를 만들어 한곳으로 물이 집중되지 않게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덕에 중국의 역사서에는 황하 수위를 다루는 풍부한 문헌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들은 기원전 220년부터 1839년까지 약 2060년 동안 문헌을 조사해, 황하가 범람할 때 북방 민족의 침입이 줄어들며 반대로 황하의 범람 가능성이 낮아질 때 북방 민족이 침략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왜 이런 관계가 나타날까?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황하의 홍수 위험이 낮아진다는 것은 황하 상류, 즉 북방 민족이 살고 있는 황토고원에 가뭄이 들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풀이 시들고 가축들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 북방 민족이 남쪽의 풍요로운 땅을 약탈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황하가 오랜 기간 범람하지 않을 때 북방 민족의 침입이 만성화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시기가 2~4세기로, 바로 삼국시대 및 그 이후 서진시대에 해당된다. 이때 북방 민족의 침입 횟수는 급격히 증가한 끝에 중국 대부분 지역이 북방 민족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물론 이 논문에도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중국 강우량, 그리고 기온 데이터가 제시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증거가 나올 경우에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다만, '삼국지' 마니아들에게 흥미로운 '사고실험(思考實驗)'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공은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본 기사는 조선일보 위클리비즈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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