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아예 구매처 바꾸면 어쩌나"… 日기업들도 '가미카제식 공격'에 우려

입력 2019.08.23 03:00

對韓수출 규제에 日기업들 전전긍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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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불화수소 제조업체인 모리타화학의 제품 출하 현장. 모리타화학은 삼성전자에 불화수소를 수출하고 있다. / 모리타화학
"수출 허가가 한 달 이상 떨어지지 않아 경제산업성(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 격)에 문의했더니 수출 심사가 강화됐다고 한다. 원래 3일이면 통과되던 건데 기약이 없어 답답하다." (쇼와덴코)

"경제산업성이 한국 기업 책임자의 서명과 인감을 추가로 요구했다. 직접 수배하고 있는데 번거롭다." (모리타화학)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첨단 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 지 두 달 남짓, 일본의 소재 수출 현장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일본 소재 업체들 사이에선 '큰손'인 한국 기업으로 수출 길이 막혀 실적이 줄어들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부 기업은 올해 실적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기 시작했다. 이번 규제를 계기로 산업 전반에서 한국 기업들의 이른바 '일본 이탈'이 줄을 이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수출 절차 부담 늘어난 일본 기업

당장 일본 소재 기업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까다로워진 수출 심사다. 준비해야 하는 서류도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한국의 특정 기업에 대해 한 번 허가를 받으면 일정 기간 동안은 건건이 심사를 받지 않고서도 수출이 가능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수출우대국(화이트리스트 국가)에 주는 '포괄허가제도'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지난달부터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3개 품목의 수출 우대 혜택을 철회하면서 수출 절차가 복잡해졌다.

3개 품목 중 불화수소는 수출할 때 경제산업성에 내야 하는 서류가 2~3종에서 9종으로 늘어났다. 구체적으로 한국 기업의 제품 제조 공정, 조달 실적, 반도체칩이나 필름패널 등 최종 제품의 사용 현황, 군사용으로 전용하지 않겠다는 한국 기업 책임자의 서명이 찍힌 서약서 등이 추가됐다. 대부분 구하기 만만치 않은 서류들이다. 포토레지스트(감광제)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치수, 재질, 성능 등을 명시하는 기술 자료 등 7종의 서류를 수출할 때마다 제출해야 한다. 원래는 처음에 2~3종만 내면 되던 것이다. 이러다보니 현장에선 매일 서류 구하기 전쟁이 벌어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불화수소를 수출하는 모리타화학의 수출 담당자는 지난 8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앞으로 수출 절차에 필요한 작업이 늘어나 현장 부담이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제산업성의 허가도 기약이 없다. 지난달 4일 3대 품목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이후 수출 허가가 난 케이스는 단 두 건뿐이다. 레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제조하는 JSR 관계자는 이달 초 니혼게이자이신문에 "7월 중순에 신청한 수출 허가가 아직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불화수소 업체인 쇼와덴코 역시 "지난달 2일 제출한 수출 신청서가 아직까지 허가 대기 중"이라고 지난 2일 전했다. 예전에는 경제산업성에 수출 신청서를 내면 보통 3일이면 허가가 나왔는데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리타화학에 따르면 불화수소의 경우 한국 수출 물량의 수출 심사가 1개월 지체되면 3억엔(약 34억원) 상당의 손해가 발생한다.

세계 최고 기업도 실적 전망 낮춰

한국과 일본은 그동안 제조업에서 상생의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를 구축해왔다. 그러다보니 일본 정부가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면 그만큼 일본 기업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특히 불화수소 업체들은 한국 수출 비중이 커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 1~4월 기준 일본 불화수소 업체들의 한국 수출 비중은 86%에 이른다.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불화수소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3사(모리타화학·스텔라케미파·쇼와덴코)도 손해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경영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며 표정 관리하던 업체들도 속속 올해 실적 전망을 하향 조정하고 있다. 쇼와덴코는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를 강화하자 올해 예상 순이익을 작년보다 19% 적은 900억엔으로 하향 조정했다. 지난 2월 발표한 예상 순이익보다 300억엔 적은 것이다. 쇼와덴코의 모리카와 고헤이 사장은 "(수출 규제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올 하반기가 가장 큰 고비가 될 것"이라고 경계했다. 액체불화수소산 세계 1위인 스텔라케미파는 수출 규제가 강화되자 "실적 영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레지스트 업체 중에선 TOK(도쿄오카공업)가 지난달 31일 올해 실적 전망치를 낮췄다. 매출액은 지난해 1116억엔에서 1005억엔으로, 영업이익은 105억엔에서 83억엔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TOK는 그동안 삼성전자가 주도하고 있는 최첨단 반도체 EUV(극자외선) 공정에 맞춰 레지스트 소재를 개발해 왔는데 수출 규제 사태로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한국에 생산 공장을 갖고 있는 TOK는 한국 공장의 생산 물량을 늘려 직접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기업의 '일본 이탈' 확산 우려

일본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일본 이탈'이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를 넘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번 수출 규제를 계기로 한국 기업들이 수입선 다변화에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평소 정부 정책에 대해 말을 아끼던 기업인들도 이달 들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에 반도체 기판 재료인 실리콘웨이퍼를 공급하는 섬코(SUMCO)의 하시모토 마유키 회장은 "(일부 소재에 대한 규제 강화로 한국 반도체 공정에 차질이 생기면) 결국 반도체와 관련된 다른 일본 업체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한국 기업에 전자부품과 소재를 수출하고 있는 일본의 한 비철금속 업체 관계자도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지난달 말 한국의 거래처로부터 대체 조달 가능한 한국 기업을 찾으면 거래처를 변경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히타치금속 관계자도 지난 2일 "한국 업체가 일본 외 국가로 조달 루트를 확대하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경제산업성 내부에서도 "한국 기업들의 일본 이탈이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도체 제작 장치 중 하나인 레지스트 도포 장치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 도쿄일렉트론의 한 관계자는 "일본의 공급 리스크가 커지면 한국 반도체 업체들이 일본 제품 구매를 꺼리면서 일본의 시장점유율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수출 규제 대상이 확대되는 오는 28일이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군사용으로 전용될 우려가 큰 탄소섬유와 일부 화학약품, 공장기계 등으로 규제를 확대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 기업에 탄소섬유를 수출하는 미쓰비시케미컬은 "수출 심사가 까다로워지면 일부 납기가 지연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한국에 반도체 노광장치 등 광학기기를 수출하는 캐논도 "(수출 규제 대상이 확대되면) 실적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고 경계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에 광학기기를 수출하는 니콘, 스마트폰 본체 제조용 로봇을 수출하는 화낙, 수소자동차의 수소탱크 소재를 만드는 도레이, 배터리 부품을 생산하는 니치아화학 등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의 손해가 더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 전문지 동양경제는 "한국은 지난해 불화수소 등 3대 수출 규제 품목 5000억원어치를 수입해 만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로 170조원을 벌어들였다"며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강화로 일본보다 한국의 타격이 상대적으로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

본 기사는 조선일보 위클리비즈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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