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캡슐 커피, 마구 입는 요가복, 괴짜스러운 패션, 스트리밍 음악… 밀레니얼 사로잡았다

입력 2019.08.23 03:00

[Cover story] 밀레니얼 세대 공략… 성공한 기업, 실패한 기업

좋아!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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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네스프레소는 캡슐 디자인이 예쁜 것으로 유명하며, 색깔별로 캡슐을 담아놓을 수 있는 전용 캡슐 홀더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②룰루레몬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소비자끼리 다양한 경험을 함께 나누는 커뮤니티를 운영한다. ③구찌는 ‘고가품은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깨면서 변덕스럽고 브랜드 충성도가 낮다고 알려진 밀레니얼 세대를 충성도 높은 소비자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④8등신 미녀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빅토리아 시크릿의 속옷 패션쇼는 2013년 970만명이었던 시청자가 작년에는 330만명으로 급감했다. /네스프레소·룰루레몬·구찌·빅토리아 시크릿
네스프레소(Nespresso)

2010년 이전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통 카페라 하면 수퍼마켓이나 도매상에서 가공된 원두를 사다가, 각자의 방법으로 음료를 만들어 파는 곳을 말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브랜드마다 특색을 살려 직접 볶은 원두로 그 자리에서 음료를 만들어주는 소위 '스타벅스'식 카페가 커피 전문점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말하자면 커피업계에 '요리사가 앞마당에서 직접 기른 식재료로 요리해주는 식당'의 시대가 닥친 셈이다.

커피업계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면서 매출 기준 전 세계 1위의 식음료 기업 네슬레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때까지 네슬레는 향이나 특색은 떨어지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양이 많은 기본적인 커피용 원두, 원두를 따로 갈 필요 없이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바로 마실 수 있는 동결 건조 커피, 공장에서 이미 병입을 마친 완제품 캔커피를 주력 상품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취향과 경험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는 달랐다. 대다수 소비자가 만족할 수 있는 기본적인 커피 대신 '나만의 커피'를 찾아 수퍼마켓 대신 동네 구석의 특이한 1인 카페를 찾거나 스스로 집에 커피머신을 들여놓고 '홈카페'를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선택 위해 캡슐형 커피 출시

네슬레는 밀레니얼 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회심의 카드로 캡슐 커피 브랜드 '네스프레소'를 꺼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 뉴욕의 소호, 런던의 리젠트 스트리트와 같은 주요국 최고급 상권에 네스프레소 브랜드 체험을 위한 대형 매장을 차렸다. 매장 외부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 매장 내부 벽면은 네스프레소 캡슐을 하나하나 모자이크처럼 박아서 꾸미고, 바닥은 고급스러운 대리석과 빨간색 카펫으로 장식했다. 매장을 찾는 소비자라면 네스프레소를 모르더라도 모두에게 커피 전문가가 눈앞에서 뽑은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 한 잔을 무료로 제공했다. '주유소나 푸드 코트에서 파는 아저씨들의 커피'라는 기존 이미지를 씻어내고, 그 자리를 젊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유행을 즐길 줄 아는 유연한 소비자상으로 채워넣기 위해서였다.

밀레니얼 세대는 네슬레의 변화를 환영했다. 유럽 스타트업 업계에서 '네스프레소 캡슐 머신'은 창업 선물 1순위로 꼽혔다. 긍정적인 반응이 불기 시작하자 네슬레는 이미지와 동시에 맛에도 과감하게 손을 댔다. 많아야 3~4종류였던 수퍼마켓 원두와 차별화하기 위해 산지와 볶음 정도, 서로 다른 지역 원두를 얼마나 섞었는지 여부에 따라 캡슐을 22개 종류로 촘촘히 나눴다. 여기에 매년 분기마다 선보이는 한정판 원두를 합치면 종류는 더 늘어난다. 캡슐 겉면에는 '장미향'처럼 주관적이고 애매한 설명 대신 커피 농도를 기준 삼아 1부터 13까지 강도를 숫자로 표시했다.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타벅스에 열광하는 밀레니얼 세대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네스프레소는 스타벅스와 손잡고 올해 2월부터 스타벅스 매장에서 파는 간판 상품 '시그니처 블렌드'를 캡슐 커피로 내놨다.

룰루레몬(Lululemon)

밀레니얼 세대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옷을 차려입기를 싫어한다. 가벼운 레깅스 차림으로 바깥을 활보하는 젊은 층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은 ‘자기 몸에 맞게 입자(body positivity)’는 철학에 따라 편안하고 기능성이 뛰어난 옷을 즐겨 입는다. 덕분에 기존 패션 시장이 전반적으로 퇴조하는데도 애슬레저 시장만큼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운동(athletic)과 레저(leisure)의 합성어인 애슬레저는 집에서 1마일(1.6km) 정도 범위 안에서 마치 잠옷처럼 편하게 입을 수 있다고 해서 ‘1마일 웨어(wear)’라 부르기도 한다.

1998년 캐나다에서 설립된 룰루레몬은 신생 브랜드의 격전지로 손꼽히는 1마일 웨어 시장에서 줄곧 압도적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내에서 룰루레몬은 브랜드 이름보다 ‘요가복의 샤넬’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경쟁사 제품보다 옷값이 평균 1.5~2배 정도 비싸기 때문이다. 얇은 요가용 여성 바지 한 벌이 100달러(약 12만원)를 웃돈다. 그럼에도 ‘비싼 값을 한다’는 평가가 압도적으로 많다. 본진인 북미권은 물론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인기가 고공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그 덕에 2008년 3억5000만달러 수준이었던 매출은 2018년 32억8000만달러로 10년 사이 10배 가까이 뛰었다.

요가 옷 사면 요가 강좌는 덤

비결은 ‘1+1’에 있다. 물건 하나를 사면 다른 하나를 더 얹어주는 ‘1+1’이 아니다. 룰루레몬은 옷을 하나 사면 다른 옷을 무료로 주거나 할인해 주지 않는다. 대신 요가 수업을 무료로 제공한다. 제품만 팔지 않고 경험을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다. 운동하기로 결심하고 스포츠 용품 매장에서 옷과 신발을 고른 소비자들은 곧 ‘어디서, 어떻게’ 운동할지 고심한다. 혼자 하는 운동에 질려 얼마 안 가 운동하길 포기하거나, 잘못된 운동법으로 크고 작은 부상에 신음하는 경우도 많다. 룰루레몬은 지역마다 매장 주관으로 요가 관련 클래스를 열고, 자체 지역 행사를 기획하고 열 수 있도록 본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소비자는 시행착오를 반복할 필요 없이 운동을 즐기면 된다.

밀레니얼 세대는 자기가 관심 있는 사안에 대해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는다. 그래서 수업을 마치면 참가자에게 제품과 수업에 관한 의견을 받는다. 신제품 개발이나 새 체험 수업을 여는 데 반영해 선순환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국내에서도 이런 의견을 반영해 요가복 판매와 전혀 관계없는 꽃꽂이, 선물 포장법, 건강한 식단 짜기 같은 수업이 추가로 열렸다. 룰루레몬 수업을 들은 밀레니얼 세대는 SNS에 ‘룰루헤드’라는 마니아 그룹을 형성하고, 선임 룰루헤드가 신입 룰루헤드를 위한 용어 사전도 만들 정도로 충성도가 높다. 단순한 제품 마케팅에 앞서 건강한 생활 습관의 중요성을 알리고, 룰루레몬 경험자를 늘려 ‘팬’을 확보하는 것이 장기적인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구찌(Gucci)

“기분이 구찌 같아(I feel like Gucci).”

밀레니얼 세대는 굿(good)이라는 단어 대신에 구찌라는 브랜드 이름을 쓰는 데 이미 익숙하다. 영어권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도 좋은 기분을 표현할 때 굿을 대신해 구찌란 용어를 쓰곤 한다.

구찌는 2014년까지만 해도 경영난에 시달렸다. 속이 탄 구찌의 모그룹 케링은 구원투수로 마르코 비자리라는 전문 경영인을 최고경영자(CEO)로 급하게 투입했다. 컨설턴트 출신인 그는 구찌 부임 직후 제일 먼저 30세 미만 직원들로 구성된 ‘그림자 위원회’부터 조직했다. ‘역(逆)멘토링 클럽’으로도 불린 이 모임은 케링그룹의 임원회에서 결정한 경영 방침을 젊은 직원들에게 재차 묻는 자리다. 관성에 빠진 구찌를 구하려면 젊은 소비자층을 사로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경영진의 목소리가 아닌, 젊은 소비자와 같은 연령층의 언어로 소통해야 했기 때문이다. 구찌 경영진은 이 위원회에서 나온 의견을 즉각 반영해 가죽 낭비를 줄이는 공정을 도입하고, 기업의 윤리적 책임을 중요시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에 맞춰 모든 제품에 모피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렸다. 디자인 수장으로 유명 외부 디자이너를 비싼 몸값을 주고 모셔오는 대신, 젊은 직원들 의견을 반영해 줄 무명의 내부 인사를 수석 디자이너로 승진시킨 것도 이 시기다.

젊은이 취향 맞는 파격 디자인

이후 구찌는 완전히 다른 브랜드로 거듭났다. 고루했던 초록색 캔버스천과 이전 로고 사용을 줄이는 대신 고가품 시장에서 터부시하던 화려하고 현란한 천연색 문양을 제품에 새기기 시작했다. 성인 남성 손바닥보다 큰 뱀과 호랑이를 티셔츠 가슴팍에 새기거나, 잠자리와 나비 같은 곤충을 본뜬 패치를 비싼 가죽 제품에 붙였다. 할머니 장롱에서 꺼낸 듯 촌스러우면서도 복고적인 매력을 묘하게 살린 새 제품들은 이탈리아의 전통적 멋스러움을 강조했던 이전 구찌 디자인과 완전히 달랐다. 전통적인 구찌 애호가들은 이런 디자인에 거부감을 가졌지만, 점잖기만 하던 고가품 브랜드를 대신할 신선한 제품을 찾고 있던 밀레니얼 세대 소비자는 장난스럽고 화려한 구찌를 ‘기그 시크(괴짜스러운 패션)’라 부르며 열광했다.

2015년 달라진 구찌를 선보이는 첫 패션쇼를 마치자, 전 세계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판매가 급증했다. 매년 뒷걸음치던 구찌 매출은 2015년 한 해에만 12%가 올랐고 여태 매년 두 자리씩 성장하고 있다. 2017년에는 매출 기준으로 에르메스를 제쳤고, 지난해에는 숙적이었던 샤넬마저 추월하며 루이뷔통에 이은 세계 2위의 고가품 업체로 자리매김했다.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고가품 시장 매출에서 밀레니얼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30% 수준이다. 반면 구찌는 소비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35세 미만이다. 경쟁 브랜드 대부분이 밀레니얼 세대를 끌어들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과 상반된 모습이다.

스포티파이(Sportify)

‘과거 세대가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한 물건들은 밀레니얼 세대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밀레니얼 세대는 큰 비용이 드는 구매를 미루거나 완전히 회피한다.’ 세계적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보고서에서 소유 대신 구독을 선호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이렇게 분석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밀레니얼 세대는 더 이상 비싼 음반을 사지 않는다. CD 1장 값이면 최소 한 달간 음원 수천만 곡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데 굳이 음반을 살 필요가 없다. 베이비붐 세대나 X세대에게 ‘처음으로 산 음반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바로 저마다 추억이 담긴 음반을 말한다. 그러나 밀레니얼 세대에게 ‘처음 스트리밍으로 들었던 노래는 뭐였냐’고 묻는다면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밀레니얼 세대 가운데 95% 이상이 그날 기분이나 상황에 맞춰 인터넷에서 음악을 바로 찾아 듣기 때문이다. 이전 세대가 서랍장을 뒤적여서 오늘 들을 노래를 카세트 플레이어나 CD플레이어에 꽂았다면, 밀레니얼 세대는 선곡을 거의 전적으로 스트리밍 서비스의 추천에 맡긴다.

2008년 선보인 스포티파이는 탁월한 추천 기능으로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글로벌 음원 시장의 리더다. 국내에서는 아직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지 않아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널리 알려진 애플뮤직조차 스포티파이의 아성을 넘보지 못할 정도로 해외에서 입지가 확고하다. 구글 앱스토어에는 ‘스포티파이가 추천해 준 주간 재생 목록은 헤어진 옛 애인이 만들어 준 것 같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 소름 끼친다’는 밀레니얼 세대의 찬사가 이어진다.

스포티파이는 정확한 음원 추천 기능을 무기로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밀레니얼 세대가 가장 선호하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강자로 부상했다. /스포티파이
심장 박동수까지 고려한 맞춤 서비스

스포티파이가 처음부터 맞춤형 추천 서비스로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다. 처음 서비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여느 업체처럼 경쟁사보다 많은 곡을 선점하는 데 매달렸다. 덜 알려진 곡 저작권까지 사들이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지만, 소비자는 인기 가요에만 몰렸고 비인기곡을 일부러 찾아 듣는 소비자는 예상보다 드물었다.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 돈을 투자한 경쟁사들이 스스로 무너지기도 했다. 위기라고 느낀 스포티파이는 2011년 사용자 취향을 고려한 맞춤형 플레이리스트 알고리즘을 짜기 시작했다. 이 알고리즘은 단순히 아티스트에 대한 사용자 선호도나 해당 트랙 재생 시간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곡별 리듬, 박자, 장르 등 정교한 음악 빅데이터는 물론 소비자가 머무는 지역의 날씨나 블로그에 남긴 이모지(Emoji), 웨어러블 기기에 기록한 심장 박동 수가 추천 알고리즘에 반영된다. 데이터양을 불려 초기에 반짝 눈길을 끌기보다 서비스 질을 높여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이다.

어설프고 복잡한 건 질색

프록터앤드갬블(P&G)

P&G: 브랜드 잘못 바꿨다가 비난

프록터앤드갬블(P&G)은 아이보리 비누, 페브리즈, 질레트 면도기, 팬틴 샴푸처럼 이름만 대면 알만한 생활 속 히트상품 브랜드 수십 개를 가진 세계적인 생활용품 전문기업이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새로 선보인 상품 중에선 어느 것도 미국 시장에서 ‘히트상품’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매출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를 달성하지 못했다. 자기 취향에 맞는 작고 전문적인 브랜드를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브랜드별 매출이 줄고, 이 여파로 연구·개발(R&D) 예산까지 타격을 입으면서 혁신의 가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지난해 데이비드 테일러 P&G 최고경영자(CEO)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고루한 브랜드 이미지를 신선하게 재정립하기로 했다. P&G 경영진은 브랜드 이름을 밀레니얼 세대가 자주 쓰는 인터넷 속어로 바꾸면,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젊은 소비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P&G가 미국 특허·상표국에 제출한 상표 등록 문서 내용이 공개되자 북미의 밀레니얼 세대 소비자는 P&G를 향한 조롱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상표로 등록하고자 했던 제품명이 ‘WTF(What The Fuck)’나 ‘FML(Fuck My Life)’같이 상품명으로 쓰기 부적절한 욕설과 ‘LOL(Lots Of Laughs)’, ‘NBD(No Big Deal)’처럼 철 지난 줄임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감성을 오해한 결과는 참혹했다. P&G의 주요 소비자층이었던 젊은 주부들을 포함한 밀레니얼 세대 대부분은 P&G가 차마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못할 수준의 저질 속어를 유머 소재쯤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일부 소비자 단체는 이런 대기업들의 무책임하고 어쭙잖은 발상은 무의식적인 언어 파괴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따져 물었다. 유행이 지난 약어로 가득 찬 특허 신청 문서는 온라인상에 떠돌며 두고두고 회자됐다. 브랜드 이미지를 재고하고 밀레니얼 세대와 동질 의식을 쌓으려던 무리한 시도가 도리어 비난의 화살로 돌아온 꼴이다.

빅토리아 시크릿: 감성 변화 놓쳐

P&G가 무언가 해보려다 실수한 경우라면 빅토리아 시크릿은 시대적, 문화적 변화에 손 놓고 가만히 있다가 뒤처진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 속옷 시장의 3분의 1을 점유했던 ‘섹시한 속옷의 대명사’ 빅토리아 시크릿의 모기업 L브랜드는 최근 1년 사이 주가가 38% 급락했다. 지난해 이후 미국 유통업이 전반적으로 부활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유독 빅토리아 시크릿은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몸을 조이지 않는 속옷이 각광받는 패션 시장의 새 흐름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 최근 여성 속옷 시장에서는 브래지어에서 철사와 패드를 뺀 ‘브라렛(bralette)’처럼 편안한 착용감을 내세운 제품이 인기다.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철학이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진 결과다. 반대로 빅토리아 시크릿의 주력 제품인 가슴을 커 보이게 하는 브래지어 같은 몸매 보정용 속옷 판매량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뒤늦게 브라렛 제품을 출시했지만, 전체 제품군에서 편한 속옷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 운동’의 여파로 노골적인 섹시 마케팅이 역효과를 낸 것도 악재였다. 그동안 브랜드의 성공 공식으로 작용했던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 이미지는 이제 여성의 성 상품화를 부추긴다는 거센 비난과 마주쳤다. 빅토리아 시크릿 광고의 정수로 꼽혔던 연말 패션쇼는 지난해 역대 최저 시청률을 기록한 뒤 결국 올해부터 중단됐다. 시장조사 업체 유고브(YouGov)에 따르면 빅토리아 시크릿에 대한 18~49세 미국 여성의 인식은 2013년 이후 꾸준히 나빠지기 시작해 지난해에는 조사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시장조사업체 글로벌데이터의 닐 손더스 연구원은 “빅토리아 시크릿 특유의 어두컴컴한 매장 내부, 노골적인 성상품화, 야단스러운 마케팅 등은 밀레니얼 세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분석했다.

본 기사는 조선일보 위클리비즈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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