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양보의 미덕을 보였으나 속뜻은 달랐다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입력 2019.08.09 10:38

[이한우의 논어 제왕학] (4) 문왕과 왕건의 사양하는 마음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우리는 흔히 겸양(謙讓)은 한 단어로 쓰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겸(謙)과 양(讓)은 전혀 다른 뜻이다. 겸(謙)이란 높은 신분이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반면에 양(讓)이란 마음가짐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임에도 하지 않거나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남에게 내어주는 행위를 말한다. 겸손과 사양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논어' 태백(泰伯)편 끝 부분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를 삼분하여 그중에서 둘을 소유하고도 은나라에 복종하여 섬겼으니 주나라 문왕의 덕(德)은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만하다."

문왕의 임금다움[君德]은 이미 충분히 지극해 은나라 제후 중에서 3분의 2가 자신에게 귀의했음에도 은나라 천자의 자리를 빼앗지 않고 그대로 은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섬겼는데 공자는 이 점을 지덕(至德)이라고 극찬한 것이다. 원래 태백(泰伯)편은 시작도 지덕(至德)으로 했다.

천자 되길 사양하고 기다린 문왕

공자가 말했다. "태백(泰伯)은 지덕한 인물이라고 부를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사양하니 백성들이 그 덕이 너무나도 커서 칭송할 수가 없었도다!" 태백(泰伯)은 은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세 아들 중 장남이었다. 둘째는 중옹(仲雍), 셋째는 계력(季歷)이다. 주나라는 태왕 때 국력이 강해진 반면 은나라는 주왕(紂王)이 여색과 주지육림에 빠져 쇠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에 태왕은 은나라를 치려 했다. 그런데 태백이 반대했다. 결국 태왕은 셋째 계력의 아들 창(昌)이 군왕의 자질을 갖추었다는 점을 간파하고서 왕위를 계력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이를 알게 된 태백은 아우 중옹과 함께 남쪽 지방인 형만(荊蠻)이란 곳으로 도망을 치고 왕위는 결국 계력을 거쳐 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가 바로 공자가 지덕하다고 극찬했던 문왕(文王)이다. 그리고 문왕의 아들 발(發)이 즉위하여 마침내 은나라를 무너트리고 천하를 소유하니 그가 바로 무왕(武王)이다. 공자가 이상적인 인물로 추앙했던 주공(周公)은 바로 이 무왕의 아우로 무왕이 죽은 후 자신의 조카인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도와 주나라 문물의 기반을 닦았다. 이처럼 '논어' 태백(泰伯)편의 주인공은 사실상 문왕이다. 흥미롭게도 공자는 주나라를 세운 무왕보다는 그 기반을 다진 문왕을 더욱 칭송한다. 제후국의 왕위를 세 번이나 사양한 태백도 물론 지덕하지만 이미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해 마음만 먹으면 천자가 될 수 있음에도 사양하고서 기다릴 줄 알았던 문왕의 지덕(至德)함에는 미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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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정다운
흑심 품고 외견상 사양했던 왕망

이처럼 사양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면 대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속마음[質]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文] 사양하는 모습을 드러내 나라를 찬탈한 인물도 있었다. 한나라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왕망(王莽)이 그런 경우다. 한나라 말기 원제(元帝)의 처가 쪽인 왕씨 가운데 왕봉(王鳳), 왕음(王音), 왕상(王商), 왕근(王根)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잡았다. 처음에 왕봉이 조정 권한을 장악하자 그의 형제와 조카들은 모두 교만해져서 위세를 부렸다. 오직 왕망(王莽)만 달랐다. 그는 훌륭한 선비처럼 매사 조심했고 청렴한 생활을 했다. 아랫사람들에게도 겸손했다. 그러다 보니 왕근은 죽음에 임박해 조카인 왕망(王莽)을 추천하여 왕씨 외척 세력을 대신하게 했다.

평제(平帝)가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또 왕망은 인재들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이에 따라 많은 선비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평제를 독살하고 어린 아들 영(嬰)을 즉위시킨 다음 스스로 정사를 대행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가황제(仮皇帝) 또는 섭황제(攝皇帝)라고 불렀다. 결국 서기 8년에 왕망은 가황제에서 진(眞)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신(新)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한나라는 멸망했다.

왕망이 이처럼 일개 외척에서 황위를 찬탈하고 한나라를 망하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은 외견상의 겸양(謙讓), 곧 그 특유의 교언영색(巧言令色) 때문이었다. 그의 본심은 그가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기 직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이 무렵 왕망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왕망의 모습은 엄숙했고 말은 바르고 곧았다.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아주 살짝만 그 의향을 드러내어 주변에서 이를 눈치로 알도록 했고, 그의 무리가 그의 뜻을 이어받아서 받들려 하면 왕망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굳게 미루고 사양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위로는 태후를 혹하게 하였고 아래로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인상을 심어주었다."

기업 경영의 기본은 禮와 讓

왕망과 같은 인물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리더의 양보하고 사양하는 태도의 중요성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공자는 이인(里仁)편에서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말한다. "사리와 겸양[禮讓]으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사리와 겸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그런 예(禮)라는 것을 어디다 쓰겠는가?"

이를 정약용(丁若鏞)은 이렇게 풀어냈다. "제후들이 황제의 자리에 대한 찬탈을 자행하고 대부가 참람한 짓을 하는 것은 능히 사리와 겸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예를 시행하고자 하여도 예 같은 것이 무슨 구실을 하겠는가?"

일의 이치[事理=禮]와 함부로 하지 않음[讓]을 기반으로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나라나 기업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국가끼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을 모르고 이치를 모르고 자신의 힘으로만 나라를 다스리고 기업을 경영하려 할 경우 예양(禮讓)은 온데간데없고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문왕만큼 덕이 높았던 왕건

우리 역사에서 이 같은 예양(禮讓)의 소중함을 잘 알아서 피 흘리지 않고 나라를 키운 제왕은 단 한 명, 고려 태조 왕건(王建)뿐이다. 왕건은 918년 궁예를 내몰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태봉에서 고려로 바꿨다. 그러나 여전히 후백제는 막강했고 신라는 남아 있었다. 926년에 신라는 사절을 보내 견훤을 공격해 줄 것을 청했다. 이에 대한 왕건의 답을 보자.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죄악이 가득 차서 스스로 넘어질 것을 기다릴 뿐이다." 왕건의 기다림은 10년을 넘기지 않았다. 935년 3월 견훤의 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금산사에 감금하고 아우 금강을 죽여버리면서 내분이 일어났다. 그해 6월 견훤은 고려에 투항해 왔다. 왕건도 문왕과 마찬가지로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나 신라를 압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순왕이 시대 흐름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여 같은 해 10월에 투항해왔다. 이로써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이룩했으니 주나라 역사를 빌리자면 문왕과 무왕의 역할을 혼자서 다한 셈이다.

그에 앞서 931년에 왕건이 사실상 한반도의 천자 역할을 하던 경순왕을 알현했는데, 수십 일 동안 왕경(王京·경주)에 머물면서도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조금도 범법(犯法)하지 못하게 하였다.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나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망해가던 진나라 백성들이 유방은 환영하면서 항우를 두려워했던 것과도 같다. 왕건의 지덕(至德)은 주나라 문왕의 지덕함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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