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간 세계를 갈아마신 미국 믹서기 "기계 아닙니다, 가족 먹여살리는 도구입니다"

입력 2019.07.19 03:00 | 수정 2019.10.11 21:15

'믹서기界의 페라리' 바이타믹스

바이타믹스(Vitamix)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인근에 자리 잡은 믹서기 생산 전문 기업이다. 1921년 창업, 올해로 98년째 믹서기만 만들고 있다. 현 CEO(최고경영자)는 조디 버그(Berg). 창업자 증손녀다. 4대째 가업(家業)을 이어가는 가족 기업이다. '고작 믹서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믹서기 업계의 페라리(또는 샤넬)'로 통하는 명품이다. 스타벅스 커피 매장에서 얼음을 간 음료 프라푸치노를 만들 때 쓰는 믹서기가 바로 바이타믹스 제품이다. 가정용 기본형 믹서기(2L 용량)가 50만원이 넘어 동급 경쟁 제품보다 보통 2배 정도 비싸다. 전 세계 130여 국으로 수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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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바이타믹스 믹서기. ② 조디 버그 바이타믹스 CEO는 사람들이 건강한 식습관을 가지도록 돕는 걸 사명으로 꼽았다. ③ 미 오하이오주 옴스테드팔스에 있는 바이타믹스 본사. ④ 창업자인 윌리엄 바너드는 1949년 지금 홈쇼핑 방송처럼 TV에 나와 믹서기를 홍보하고 판매했다. 당시로선 획기적 시도였다. / 바이타믹스
클리블랜드 도심에서 교외로 30여 분 달려 주택가 밀집 지역을 지나다 보면 옴스테드팔스란 작은 마을에 바이타믹스 본사가 있다. 공장 역시 클리블랜드 권역에 있으며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고집하는 기업이다.

본사 정문 바로 옆엔 작고 낡은 가옥(家屋)이 하나 눈에 띈다. 윌리엄 바너드 창업자가 90여 년 전 가족과 살았던 집이다. 지금은 바이타믹스 역사박물관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집 안에 들어서니 누런 바이타믹스 제복을 입은 노신사가 방문객을 반긴다. 그는 느릿느릿 친절하게 내부 구조와 유품들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실버 인턴쯤 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창업자 손자이자 전 CEO였던 존 바너드 회장이었다. 버그 현 CEO의 아버지다.

본사는 단정하고 깔끔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버그는 후덕한 미소로 인사한 다음 또렷한 억양으로 답변을 이어갔다. 그는 바이타믹스에 오기 전엔 호텔 업계에 오랫동안 몸을 담은 바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거듭해서 강조한 건 바이타믹스가 추구하는 '가치(value)'다. 그 가치는 가족(family), 고객(customers), 품질(quality), 성실(integrity), 협력(teamwork) 5가지로 요약된다. 회사는 이 가치 체계를 간단하게 정리한 명함 크기 메모장을 만들어 전 직원 1000여 명에게 나눠줬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상기해달라고 당부한다. 투자와 확장, 시장 개척, 제휴사 선택까지 모든 회사 활동은 이 5가지 가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가족'을 회사 중심 가치로 설정

―회사 가치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게 '가족'이다. 가족 기업이라서 그러나.

"우리는 이 믹서기가 단지 판매용 기계가 아니라 가족을 먹이기 위해 쓰는 도구라는 걸 명심한다. 애초 창업 이념도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기업을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사명(mission)을 기업 활동을 통해 실천한다. 고객도 가족처럼 대하자는 구호가 담겨 있다. '가족'이란 단어가 모든 경영 화두의 출발점인 셈이다."

―그런 가치는 어떤 식으로 조직 운영에 반영하나.

"모든 직원은 가족이다. 가족끼리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오늘 딸 축구 경기가 있는데 오후에 상사에게 조퇴하겠다고 얘기해도 될까…' 하고 망설여서는 곤란하다. 당연히 상사가 '어 그래? 당연히 가봐야지. 여기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빨리 가보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을 추구한다. 그럴 때 구성원들은 '안정감'을 느낀다(feel safe). 일할 때 불필요한 근심과 고민은 줄어들고 더 집중할 수 있다. 결국 생산성도 올라간다. 다니는 회사를 자기 회사처럼 여기게 된다."

―직원을 뽑을 때도 그런 가치에 대한 공감도를 면밀하게 보나.

"물론이다. 바이타믹스에 다니려면 5가지 가치를 몸에 새겨야 한다. 능력만 있고 배려가 없는 지원자는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배제한다. 면접할 때 가족에 대해 물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가족 얘기를 꺼내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신나게 얘기한다. 반면 어떤 이는 퉁명스럽게 '아내와 아이가 둘 있다' 하고는 끝이다. '아이는 몇 살인가요' 다시 물어도 '열 살하고 여덟 살' 단답형이다. 이런 지원자는 탈락이다.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 바이타믹스 기업 가치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재능은 남다른 직원을 뽑으면 단기 실적이 혹시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론 분위기를 해치고 결국 마이너스다."

가족 승계는 엄격한 검증 거쳐

컨설팅 회사 이곤젠더 조사에 따르면 가족 경영 기업 중 2세대로 넘어가면서 살아남는 비율은 30%, 3세대는 12%, 4세대까지 내려가면 그 비율은 3%대로 떨어진다.

―곧 창업 100주년이다. 4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데 어려움은 없나.

"창업 철학을 성공적으로 계승하는 게 쉽지 않다. 창업 이념을 보전하면서 성장까지 이루기는 아주 힘든 일이다. 아무래도 외부 인사보다는 가족 구성원 중 하나가 기업을 물려받았을 때 이런 창업 가치가 더 원만하게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곁에서 할아버지나 아버지·어머니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겪는 고뇌와 분투를 지켜보며 자란 가족이 그 내적 가치에 대해 더 깊게 공감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 아닌가."

―가족 중에서 적임자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계속 풀어야 할 숙제다. 바이타믹스에 입사하고 CEO 자리에 오르기 전 아버지와 부녀 간에 대화를 빙자한 검증 과정을 혹독하게 거쳤다. 과연 기업 가치를 제대로 살리고 회사를 성장시킬 능력이 있는지 아버지는 끊임없이 묻고 따졌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상대적으로 기업 경영에 관심이 적어 내가 후보에 올랐는데 외부 인사들로 이뤄진 추천위원회 면접까지 엄격하고 힘든 절차를 마쳤다.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경영에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니다. 자질이 있는지 꼼꼼하게 점검한 다음이어야 한다. 기업 환경이 더 복잡해지는 요즘은 이 과정이 더 철저해야 한다."

―바이타믹스 믹서기의 디자인이 비교적 평이한 편이다. 좀 더 멋있고 날렵하게 만드는 건 어떤가.

"바이타믹스 제품은 '할머니부터 대물림해서 쓰는 믹서기'다. 디자인을 최신 유행에 따라 해봤자 10년이면 확확 변하는데 30년, 40년 가는 믹서기 디자인이 얼마나 유행을 유지하겠는가. 그것보다는 정말 소비자가 원하는 기능이 뭔가를 주목해서 그걸 반영하는 데 골몰한다."

믹서기도 대물림하도록 튼튼하게 제작

버그는 바이타믹스 매장에서 한 고객을 만난 일을 전해줬다. 그 고객은 새 믹서기를 사러 왔다면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사연을 물으니 집에 있는 바이타믹스 믹서기가 50년 됐는데 고장 나서 고치러 갔더니 부품이 단종되는 바람에 이제 새 믹서기를 사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 "집도 여러 차례 옮기고 차도 많이 바꾸고 애완동물도 왔다 가길 반복했는데 50년 동안 유일하게 곁을 계속 지킨 건 이 믹서기뿐"이라며 "이제 떠나보내려니 너무 허전하고 속상하다"는 얘기였다. 버그는 기술자를 보내 그 고객이 정든 믹서기를 계속 쓸 수 있도록 조치해줬다. 바이타믹스가 가진 고객 감동 경영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다.

버그는 "회사 역사상 첫 여성 CEO인데 불편한 점은 없냐"고 묻자 "글쎄… 구두 굽이 좀 낮으면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다"면서 웃었다. 이어 "바이타믹스는 기업 특성상 결국 '엄마' 심정을 아는 여성 경영자가 더 유리하다"면서 "'어, 가격이 싸네. 그럼 하나 살까' 하는 고객보다는 '이 믹서기는 비싸지만 정말 꼭 필요해' 하는 고객을 위해 제품을 만드는 게 본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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