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투로 총맞아 죽은 푸시킨과 차이콥스키의 만남

    • 박종호 풍월당 대표

입력 2019.06.21 03:00 | 수정 2019.08.11 15:28

CEO 오페라 (14)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렌스키와 오네긴의 결투 장면. 친구였던 두 사람은 오해와 질투 때문에 결투를 벌이고 오네긴은 렌스키를 죽이고 만다(위 사진). 아래 사진은 오네긴(오른쪽)이 타티아나가 쓴 고백 편지를 되돌려주는 장면. /풍월당
어려서 경주 불국사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에 절 앞에 가게들이 줄 서 있었는데, 가게마다 나무판자에 인두로 지져 글과 그림을 새긴 것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마루에는 그 판자들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 한결같이 쓰인 구절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였다. 삶이 어떻게 나를 속인다는 건지도 몰랐지만 저절로 외워졌다.

그 구절을 쓴 시인이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를 날려서, 젊은 관리로 근무할 때에 이미 유명하였다. 하지만 그는 결투에서 총을 맞아 불과 38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푸시킨은 자신의 작품 속에 자기가 죽은 모습을 이미 너무나 똑같이 그려놓았다. 그것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남겨

시골의 대지주 집안에 두 딸이 있었다. 언니 타티아나는 독서에 빠져 있는 내성적이고 몽환적인 처녀다. 동생 올가는 활발하고 현실적이다. 올가에게는 렌스키라는 약혼자가 있는데, 섬세한 성격의 시인이다. 하루는 렌스키가 이 집을 방문할 때 새로 사귄 친구인 예브게니 오네긴을 데리고 온다. 오네긴을 본 타티아나는 한눈에 연정을 느끼고, 정열적인 편지를 써서 보낸다. 이것이 '편지의 장면'으로서, 미지의 남자를 향한 불타오르는 감정과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교차하며 밤을 새워서 쓰는 명장면이다. 하지만 며칠 후에 돌아온 오네긴의 대답은 타티아나에 대한 힐책이고, 그녀는 창피해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 후 이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오네긴은 타티아나가 불편하여 올가하고만 춤을 추는데, 이것이 렌스키의 신경을 건드린다. 성급한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하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 된다. 겨울 새벽의 설원에서 벌어지는 '결투의 장면'은 음악으로만 들어도 눈에 보이듯이 시리고 애절하다. 결투 직전에 죽음을 예감하는 렌스키가 부르는 '어디로 가버렸나, 황금 같은 청춘은?'은 러시아 오페라에서 최고로 치는 테너 아리아다. 젊은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푸시킨의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렌스키는 죽고, 오네긴은 외국으로 피한다. 나중에 자매는 다들 혼담이 들어와서 결혼하여 시골을 떠난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시절은 아쉬움을 가득 실은 채로 사라져간다.

몇 년이나 지났을까. 오네긴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고, 알고 있던 그레민 공작의 파티에 참석한다. 나이 많은 퇴역 장군인 그레민은 그동안 결혼을 했다. 그의 결혼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오네긴에게 공작은 베이스 아리아 '나이 든 사람에게도 사랑은 온다네'를 부르는데, 노회한 저음이 심금을 울린다. 그리고 공작이 아내를 소개하는데, 사교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화려하고 우아한 여성이다. 그녀가 타티아나였다. 이제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는 것은 오네긴이다. 시골에서 타티아나가 그랬듯이. 그리고 오네긴은 급하게 만나자는 편지를 타티아나에게 보낸다. 그녀가 그랬듯이…. 그리고 만나는 두 사람. 타티아나는 오네긴에게 끝까지 품위를 지키면서 그간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을 다 한다. 그리고 붙잡는 그를 뿌리치고 나간다. 오네긴의 후회 속에 막이 내린다.

차이콥스키 최고의 오페라

차이콥스키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는 11편이나 되는 오페라를 썼지만, 그의 다른 장르에 비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손대지 않은 음악 분야가 없었으나, 가장 뛰어난 분야는 사실 오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 최고의 걸작은 '예브게니 오네긴'이다.

이 오페라는 앞서 말한 개성이 다른 네 주인공들의 성격과 감정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푸시킨의 재능 넘치는 대사에 차이콥스키의 유려한 음악이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비록 가사를 몰라도 음악만으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인 노래와 멋진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푸시킨이나 차이콥스키나 둘 다 자신들이 경험했던 청춘의 정열과 회한을 있는 대로 담아서 가장 세련된 필치로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타티아나를 만나서 지난날을 후회하는 마음이 어찌 오네긴만의 것이겠는가?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 누구나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올 것이다. 비로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말을 알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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