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집단농장 해체하자 수확량 4배↑

    •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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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6.07 03:00

      [홍춘욱의 경제사 여행] (1) 中 경제성장 토대가 된 토지개혁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중국의 경제성장 원천'에 대한 부분은 경제사적으로 호기심을 부르는 소재다. 한국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 경제 대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빈곤의 악순환을 탈출하고 이른바 'G2'가 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8년 이전 환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를 밑도는 등 이른바 '생존 수준'의 소득도 올리지 못하는 나라는 공통적으로 세 가지 '악순환'을 겪는다.

      먼저 인구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식량 자급이 어려워 만성적 무역 적자를 기록한다. 더 나아가 생계 수준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저축이 부족해 경제 전체에 자본의 부족이 심각한 수준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킬 여력이 없으니, 경제 전반 인적 자본은 처참한 수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제기된다. 한국이나 대만, 그리고 중국 등 저개발 국가는 대체 어떻게 빈곤의 악순환을 탈출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중국의 도시화 과정을 다룬 박인성 교수 저서 '중국의 도시화와 발전축'을 잠시 인용해 보자.

      집단농장 시행 후 생산성 격감

      "1958년 '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잡자'는 구호를 내세운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고, 허풍과장 보고, 과다 지표, 극좌 구호, 강압적 명령 등의 바람이 중국 농촌을 휩쓸었다. (중략) 1958년 허난성 전체의 양식 생산량은 실제로 281억근이었지만, 허난성 위원회는 황당하게도 721억근이라고 부풀리고 이를 근거로 양식 징수 지표를 정하고 시행하였다. (중략) 그들이 이런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 이유는 생산량을 속이고 감추는 것은 '우파'라는 식으로 반혁명 분자의 딱지를 붙이고 협박해,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숨기고 저장해둔 양식을 빼앗아 내기 위함이었다."

      20세기 최악의 기근이 중국에서 벌어졌던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큰 공장일수록 생산성이 높기 마련인데, 왜 중국이나 북한의 집단농장은 심각한 식량난을 유발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집단농장에 편입될 때 가축 소유권을 빼앗긴다는 것을 알아차린 농민들이 가축을 대부분 도축해 버렸던 것이다. 경운기 등 농기계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가축 도살로 농업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마이너스 요인이 있었으니, 바로 집단농장에 편입된 농가들의 근로 의욕 상실 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중부의 안후이성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토지개혁이 한창이던 1950년 1월. 한 농부가
      중국 토지개혁이 한창이던 1950년 1월. 한 농부가 "인민의 정부가 땅을 나눠준다"는 구호판을 들고 있다. / 게티이미지
      1952년 이후 중국 농업생산액 추이
      덩샤오핑, 집단농장 해체 지지

      "1978년 추수를 끝낸 후 안후이성 샤오강촌의 집단농장은 작업조를 나누고 '조별 도급제'를 시행했으나, 각 작업조 내부에서 작업량의 기록과 출근, 작업 태도 등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모두 "차라리 해산하고 말자"고 말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중략) 1978년 11월 24일 밤, 샤오강촌 생산대의 18호 농가 호주들은 1차 비밀회의를 열었다.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마을의 지도자 옌훙창이 '생사협약'이라고 한 협약서의 초고를 낭독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각 호 단위로 농지를 나누고, 각 호의 호주가 서명하고 날인한다. 이후 가정마다 정부에 납부하는 공량 외에는 어떤 돈도 양식도 다시 요구하지 않는다. 상부와 외부에 비밀을 유지하고, 발설하는 자는 전 촌민의 적이다. 만일 실패하여 간부들이 감옥에 가게 되면,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아이를 18세가 될 때까지 양육할 것을 보장한다.'"

      마지막 대목에서 당시의 긴박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후 기적 같은 일이 샤오강촌에서 벌어졌다. 1979년에만 양식 6만6000㎏을 생산했는데, 이는 1966~1970년, 즉 5년간의 생산량과 맞먹는 양이었다. 물론 샤오강촌의 비밀이 오랫동안 지켜질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은 샤오강촌의 행동을 지지했다.

      "(안후이성 성장) 완리: 어려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 완리가 모양새만 바꾸어 자본주의(=개별 경작)를 한다고 욕하고 비난합니다.

      덩샤오핑: 완리 동지, 다른 사람에게 모자를 씌우고 딱지를 붙일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게. 덩샤오핑은 인민을 굶겨 죽이는 것이 곧 범죄라고 하더라고."

      덩샤오핑의 집단농장 해체에 대한 지지 의사는 역사적 전환점을 제공했다. 1952년부터 1977년까지 농업 생산액은 연평균 4.1% 늘어나는 데 그쳤지만, 집단농장이 해체된 1978년부터 1995년까지의 연평균 증가율은 무려 14.9%를 기록했다.

      농업혁명 덕에 제조업 도약 가능

      농업 부문의 놀라운 생산성 개선, 다시 말해 농업혁명은 중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전체 인구의 82.1%가 살고 있는 농촌 지역 소득 증가는 무엇보다 경제 전체 성장으로 연결되었다. 실제로 중국 경제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연평균 10.09%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농업혁명 뒷받침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농업혁명의 기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농업 생산성 개선은 곧 물가를 안정시킬 뿐만 아니라 농촌 소비가 대규모로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식량 수입의 필요성이 낮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무역수지가 개선되었고, 그 결과 산업화에 필요한 각종 자본재를 수입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잉여농산물이 생기고 농업 부문에 잉여 인력이 발생하면 제조업이 발달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게 된다. 또 중국의 농업혁명은 복지 측면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불경기 때 해고당한 이주 공장 노동자들이 가족농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