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보다 30년 앞선 원조… '패션의 가치는 돈이 아니다'

입력 2019.06.07 03:00

[Cover Story] 세계 SPA업체들 "자라를 잡아라"

H&M

카를 요한 페르손 H&M 최고경영자(CEO).
카를 요한 페르손 H&M 최고경영자(CEO). /H&M
너나없이 많은 브랜드가 난립하는 패스트패션 시장에서 H&M은 역사로 따지면 단연 '원조' 격인 브랜드다. 한국 진출은 자라나 유니클로보다 늦은 2010년에야 이뤄졌지만, 설립 시기를 찾아 올라가면 1947년으로 자라를 30년 가까이 앞선다.

H&M 창업주 얼링 페르손은 원래 문구류 유통업을 하던 패션 문외한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 여행을 갔다가 대형 백화점에서 수많은 옷을 쌓아 놓고 파는 미국 소비문화에 반했다. 그 후 스웨덴으로 돌아와 문구점을 여성 의류점으로 바꾸면서 다른 스웨덴 가게보다 더 싸고 도회적인 옷으로 가득 채웠다. 이 전략은 전후 급성장한 스웨덴의 경제 상황과 성평등주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져 큰 성공을 거뒀다.

얼링의 아들 스테판 페르손은 '많은 옷을 싸게' 공급한다는 기본 전략 위에 패스트패션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만한 특유의 속도감을 더했다. 스테판은 스웨덴에서 선전하던 H&M을 창업 30년 만인 1976년 영국에 소개했고, 1990년에는 아버지에게 영감을 줬던 패션의 메카인 미국 뉴욕 5번가에 진출했다. 스웨덴에서 옷을 디자인한 후 인건비가 낮은 공장을 수소문해 거기서 옷을 만들고 전 세계 매장에서 팔았다. 그가 취임한 1982년 135개였던 전 세계 H&M 매장 수는 스테판의 아들 칼 요한 페르손이 최고경영자로 앉은 2009년 1900여개로 14배 늘었다.

H&M
패션계에서 변방에 속했던 스웨덴 의류기업이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비결은 '중용(中庸)'에 있다. 의류업계 전문가들은 자라를 '최신 유행을 즉시 반영할 정도로 패션에 민감한 브랜드', 유니클로를 '유행보다 소재에 집중하고 누가 입더라도 튀지 않는 단정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브랜드'로 평가한다. 하지만 H&M은 두 브랜드 사이에서 어중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그 특징을 뭐라 뚜렷하게 잡아내기 어렵다.

매년 세계 최고 디자이너들과 협업

H&M의 디자인 혁신 전략은 큰 피라미드 형태에 비유할 수 있다. 시장 흐름을 선도할 만한 앞선 하이패션(high fashion) 디자인의 제품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소량만 배치한다. 피라미드 가운데 부분은 일반 소비자들이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부담없이 소화해낼 만한 가벼운(current fashion) 의류로 채우고, 가장 넓은 하단 부분에는 남녀노소 모두 일상적으로 입는 평범한 디자인의 현대적인(modern basic) 아이템으로 구성한다. 이 때문에 화려한 옷이 진열장에 걸린 모습을 보고 매장에 들어간 소비자는 실제 쇼핑을 마치면 대부분 손에 익숙한 디자인의 무난한 의류를 들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유행을 선도하는 제품을 샀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추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해하다 싶을 정도로 어려운 최신 의류로 꾸미는 '토털 룩(total look)'의 시대가 지고, 단순한 의류를 중심으로 한두 군데 강렬한 아이템으로 포인트를 주는 '믹스 앤드 매치(mix and match)'가 대세로 떠오른 현재 추세와도 맞아떨어진다.

H&M은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는 '시즌별 컬래버레이션'으로도 유명하다. 2004년 당시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카를 라거펠트와 협업을 시작으로 스텔라 매카트니, 빅터앤드롤프, 콤 데 가르송의 레이 가와쿠보, 지미 추, 베르사체, 모스키노 같은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해마다 작업하고 있다. 매년 컬래버레이션 제품 발매일이 결정되면 본래 수십~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을 H&M에서 저렴하게 사려는 대기 인파로 매장 앞이 장사진을 이룬다. 국내서도 발매 3일 전부터 명동 매장 앞에서 노숙하는 소비자들이 언론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는 단지 소비자를 현혹하기 위한 마케팅이라기보다 '패션의 가치는 값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H&M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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