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전설이 되다… 사업 설명회에서 엘비스 열창한 30대, 호주 IT혁명 이끌며 나란히 최고 갑부로

입력 2019.05.24 03:00

이철민의 Global Prism (18) 호주 최대 테크 기업 아틀라시안

이철민 기자
지난달 12일, 5000명이 가득 메운 미국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 베이 컨벤션센터의 무대에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 낸 사내들이 나타났다. 현란한 조명 속에 이들이 열창한 노래는 프레슬리가 1964년 영화 속에서 부른 '비바 라스베이거스'를 살짝 바꾼 '지라(Jira) 라스베이거스'. 이날 이벤트는 호주 최대 테크 기업인 아틀라시안(Atlassian)의 연례 설명회 중 하나로, 무대 위에서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몸을 흔들어댄 이 중에는 올해 39세인 두 창업자 마이크 캐넌-브룩스(Cannon-Brookes)와 스콧 파쿠아(Farquhar)도 있었다.

아틀라시안의 대표 상품인 지라는 개발자들뿐 아니라 일반 사무직도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의견을 조율하고 서로 진행 사항을 파악하며 계속 수정할 때에 매우 유용한 협업 소프트웨어다. 아틀라시안이 세워진 것은 2002년. 그러나 지라를 비롯해 컨플루언스, 비트버킷, 트렐로 등 아틀라시안 제품들은 이미 미 항공우주국(NASA)과 페이스북, 오라클, 아마존, AT&T, 아우디, 에어비앤비, 넷플릭스 등 유수의 기업들이 사용한다. 덕분에 2015년 12월 미국 나스닥 시장에 처음 상장된 아틀라시안의 시장 가치는 21일 현재 302억달러에 달한다. 작년에 매출 10억달러를 돌파했다. 협업 프로그램을 판매하는 아틀라시안의 나스닥 종목명도 '팀(TEAM)'이다.

아틀라시안의 공동 창업자인 마이크 캐넌-브룩스(왼쪽)와 스콧 파쿠아. 두 사람은 지난달 12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연례행사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으로 무대에 올라 '지라, 라스베이거스'를 열창하는 회사의 미래전략가 돔 프라이스의 양옆에서 몸을 흔들며 흥을 돋우었다. /아틀라시안
대학 동기 2명이 맨손으로 창업

공동 창업자 마이크와 스콧은 각각 71억달러의 부(富)를 일궈 호주에서 IT 분야로는 처음으로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지만, 시작은 매우 미약했다. 명문 뉴사우스웨일스대(UNSW)의 비즈니스정보기술학과 동기 동창인 두 사람이 신용카드 빚 1만달러로 창업할 때의 꿈은 "평생 정장을 입을 필요 없이, 연봉 4만8500호주달러(약 4000만원) 정도 버는 것"이었다. 이 소박한 꿈은 멀기만 했다. 둘이 기업들의 IT 업무를 도우며 첫해 번 돈은 각각 1만5000호주달러. 후원을 받아 미 오라클사의 콘퍼런스에 참석했지만, 공용 화장실이 딸린 싸구려 모텔 방에서 세 명이 함께 자야 했다. 마이크는 온기(溫氣) 한 점 없는 방에서 새벽 4시 뜨거운 물에 언 손을 녹여가며 코딩(coding)에 매달렸다. 라면이 주식(主食)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독자 제품 '지라'를 만들었지만, 알릴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거금 2000달러를 들여 맥주를 사 아틀라시안 로고를 붙이곤, 브뤼셀의 개발자 콘퍼런스를 무작정 찾아가 입구에서 나눠줬다. 스콧은 "순박한 젊음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고 일간지 오스트레일리안에 당시를 회고했다. 2003년 미 항공사 아메리칸에어라인으로부터 '지라' 구매를 신청하는 첫 팩스가 오면서 이름이 서서히 알려졌다. 이 최초의 구매 팩스는 지금도 스콧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다.

영업 인력 없이 웹사이트에서 직판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은 극명하게 달랐다. 스콧은 시드니 서쪽의 전형적인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주유소에서, 어머니는 맥도널드와 유통 체인 타깃에서 일했다. 열한 살 때 컴퓨터 게임을 하는 친구가 부러워 아버지를 졸랐지만, 1년 뒤 아버지가 구해 온 중고 왕(Wang) 컴퓨터에선 마이크로소프트 도스(DOS)도 작동하지 않았다. 고교 졸업 후 스콧의 삶은 하마터면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다. 초급장교를 배출하는 호주국방아카데미(ADFA)에 지원했지만, 합격 통지서가 두 달 뒤에나 도착했다. 그새 그는 UNSW에 합격했고, 거기서 일생의 친구 마이크를 만났다.

마이크는 시드니 동쪽의 부유한 교외에서 자랐다. 부모는 영국계로, 아버지는 호주에 시티뱅크를 처음 연 금융인으로 애플 매킨토시광(狂)이었다. 스콧이 고장 난 컴퓨터와 씨름할 즈음인 1991년, 마이크의 집에는 인터넷이 설치됐다. 월드와이드웹(WWW)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타이완·홍콩·런던 등지에서 자랐고, 시드니 최고 기숙학교 크랜브루크를 졸업했다. 당연히 처음엔 어울리기 쉽지 않았지만, 졸업 후 마이크의 창업 제안 이메일에 유일하게 '예스'한 대학 동기생이 스콧이었다.

아틀라시안의 성공 비결 중 하나로, 영업 인력을 별도로 두지 않는 '판매 모델'을 든다. 누구든지 아틀라시안이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제품을 바로 구매할 수 있다. 한 팀이 저렴한 가격에 먼저 써 보고 소문이 나면 회사가 대량 구입하고, 이후 계속 번지는 식이다. 전 세계 IT 업계에서 불모지 같았던 호주에서 두 사람이 최대의 테크 수출 기업을 키워낸 과정은 분명히 '성공 스토리'다. 하지만 기회와 도전은 이제부터다.

지난달 18일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아틀라시안의 사업 영역이 커지면서, 실리콘밸리의 공룡 테크 기업들과 영역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아틀라시안의 웹 기반 코드 호스팅 서비스인 비트버킷(Bitbucket) 비즈니스에선, 작년 마이크로소프트가 75억달러에 기트허브(Github)를 인수하면서 경쟁이 붙었다. 2015년 아틀라시안이 기업공개(IPO)에 맞춰 야심 차게 내놓은 업무용 메신저 서비스인 힙챗(Hipchat)은 전 세계를 휩쓴 경쟁 서비스인 슬랙(Slack)에 완전히 묻혔다.

반(反)이민 정책에 인재 수혈 난관

인구 2500만명인 호주에서, 아틀라시안이 얼마나 최고의 IT 인재를 구할 수 있느냐도 관건이다. 지금도 회사 인력의 3분의 2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그래서 정치와 거리를 두는 호주의 여느 테크 기업과는 달리, 창업자 마이크는 종종 트위터와 언론을 통해 반(反)이민 포퓰리즘 정책을 펴는 정치인들을 맹공하고, 학교 수업에 코딩과 공학이 더 포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2017년 피터 더턴 내무장관이 "당신들 일이나 잘하시오"라고 하자, 마이크는 바로 "당신 일은 나라를 경영하는 것인데, 별로 잘하는 것 같지 않다"고 맞받았다. 호주는 석탄·철광석·아연·납·금·우라늄 같은 광물질이 풍부해, 성인 1인당 평균 재산(53만달러)이 작년에 세계 1위다. 마이크는 나라 전체가 광물 자원에 취해, 장기적으로 테크 산업 투자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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