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뜬구름 속 그들만의 전략 계획, 社內 권력이 되다

    •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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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4.12 03:00

      [박찬희의 '까칠한 경영'] (3) 전략경영의 변질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수십조원이 걸린 인수합병(M&A)을 즉흥적으로 할 순 없다. 미리 알아보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크고 복잡해진 회사일수록 이런 과정을 통해서 손발을 맞춰야 하고, 정리된 내용으로 투자자와 이해관계자를 설득해야 한다. 전략 계획이 필요한 이유다.

      현실은 어떤가? 달라진 세상에 맞지도 않는 계획을 들이대며 시도 때도 없이 실적 보고를 요구하거나, 황당한 목표를 우겨대며 권세를 떠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변화를 담지 못한 전략 계획

      소니는 한때 워크맨을 비롯한 혁신적 제품들로 세계를 주름잡았다. 1995년 취임한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은 일찍이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를 내다보고 소니 제품들이 서로 연결되어 작동하면서 생활의 중심이 되는 전략을 마련했다. '킬러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영화와 음악 분야에도 과감하게 진출했다. 스티브 잡스가 꿈꾼 세상을 10여 년이나 앞서 구상한 것이다.

      소니 예상은 상당 부분 맞았다. 하지만 디지털 미디어의 진화는 생각보다 느렸고, 인터넷과 모바일 세상은 세부적으론 소니의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소니의 전략 계획은 세밀하고 구체적이었지만, 운영체제(OS)와 기술표준에서 밀렸고 모바일이 가져온 사용자 환경의 변화를 놓치면서 무너졌다.

      소니는 왜 전략을 수정하며 진화시키지 못했을까? 회사에 수십 년을 바친 천상계(天上界) 임원들에게 게임이나 모바일 영상은 '애들 노는 얘기'일 뿐이었다. 연구소나 마케팅 현장에서 하루를 다투는 사원들에게 디지털 미디어의 미래는 다른 세상 일이었다. 은행과 투자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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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정다운
      현장 목소리를 '게으른 푸념'으로 폄하

      전략 계획이 소수 '기업 관료'들의 전유물이 되어서 이들이 책상머리에서 짜 맞춘 논리가 미래를 구속해 버리는 경우는 많다. 요리조리 빠져나갈 변명거리를 담느라 보고서는 두꺼워지고 '첨단 경영 기법'으로 포장할수록 뭘 하자는 건지 모호해진다. 뻔히 아는 내용을 낯선 경영학 용어로 '번역'해서 떠들다 보니 말끝마다 핵심 역량, 경쟁 우위 운운하는 장황한 학술 토론이 돼 버린다.

      현장 생각은 거칠고 모호하다. 오래 붙잡고 따질 여유도 없다. 전략 스태프는 이런 생각에서 단서를 찾아 구체적인 대안으로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면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그런데 현장의 적나라한 목소리가 '게으른 푸념'으로 폄하되거나 '거슬리는' 소리가 되어 철퇴를 맞기도 한다.

      크고 복잡한 조직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면 목표 설정과 실행에 일정한 강제성 혹은 경직성(rigidity)이 불가피하다. 조금 힘들다고 바꾼다면 되는 일이 없기 때문. 하지만 기존 전략과 실행 계획, 목표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되면 실제 일하는 사람들이 배제된 '그들만의' 전략 계획은 권력이 된다. '어명'이 떨어지면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눈치만 보는 회사는 사람들의 힘과 지혜를 모을 수가 없다.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된 사업이 세상을 바꾼 사례는 많다. 3M의 포스트잇은 실패한 접착제 실험에서 시작되었고, 후지필름은 몇몇 직원이 동문회 나가서 회사 걱정하다 찾은 아이디어로 광학기술 전문 회사로 다시 태어났다. 기술이나 산업의 불연속적·근본적 변화는 도둑처럼 찾아와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설명하기도 어렵다. 이런 변화에서 구체적 사업 기회를 풀어내는 게 전략 계획의 역할이다. '시키는 일이나 하고 결과 보고하라'는 식의 전략은 남들 뒤꽁무니 따라가며 변명거리 찾을 때나 유용하다.

      '어명'을 내세워 찍어 누르는 전략 계획에는 "최고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세계 수준의 인재를 영입했다"는 설명이 더해진다. 사실은 "더 이상 답이 없으니 내 책임 아니다"하는 방패 같은 변명일 뿐이다.

      월급쟁이들은 잘 짠 전략 계획이 있어야 보고하고 결재받는 데 편하다. 신속한 목표 조정, 과감한 전략 수정으로 이미 보고한 내용이 달라지면 오히려 피곤해진다. 회사 이름을 닷컴으로 바꾸면 주가가 오르고 '모바일 관련 주식'이 되면 투자 유치가 쉽듯이 자본시장에도 유행이 있어서, 전략 계획이 여기에 휘둘리기도 한다. 미디어는 한창 유행하는 경영 이론을 담은 전략 계획을 좋아한다. 핵심 역량, 애자일(agile) 전략, 플랫폼, 공유 가치 등이다. 여기에 맞추면 혁신하는 회사로 보인다.

      2000년대 초반 회계 부정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미국 엔론의 전략 계획도 (부실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주목 대상이었다. 엔론이 망할 무렵 출간된 '인재전쟁'에는 최고 인재들이 첨단 경영 기법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사업을 만드는 사례들로 가득하지만 회사를 거품 덩어리로 만드는 위험한 전략에 반대한 용감한 인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더 크게 망했다. 전략 계획이 거품 제조기로 쓰인 셈이다.

      '바보들의 합창' 되면 모두 망한다

      회사를 오로지 최고 경영자의 직관에만 의지해서 경영할 수는 없다. 전략 계획으로 방향을 잡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손발을 맞추고 자원을 배분해야 혼선이 없다. 구성원들은 전략 계획 과정에서 새로운 사업 방향을 이해하게 되고 때로는 싸워가면서 동의하게 된다.

      반대로 전략을 현장의 창의적·직관적 아이디어만으로 만들 수도 없다. 통신사를 예로 들어 보자. 청소년들이 어떻게 게임을 하고 데이터를 쓰는지, 주부와 노인이 어떤 콘텐츠를 좋아하는지, AI 스피커 같은 단말 장비들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직접 접촉 면에 있는 현장 생각이 중요하다. 이에 반해 규제 동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금 체계를 둘러싼 국회와 통신 당국의 속사정이 무엇인지는 최고 경영자와 스태프들이 더 잘 안다.

      그래서 전략 계획은 최고 경영자의 전략 구상이 실천되는 하향(top-down) 과정과 현장에서 떠오르는 전략이 반영되는 상향(bottom-up) 과정이 모두 필요하다. 이 두 가지 방향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과정에서 크고 복잡한 조직에 필요한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 구성원의 열정이 담긴 자발적 사업 의지가 모두 담긴 전략 계획이 탄생한다.

      무능한 경영자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전략 계획이 '어명'이 되어서 사업의 현실을 깔아뭉개도 숫자 맞춰서 돌아가는 '체계적 관리'의 달콤함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가지런히 짜 맞춰진 숫자에 숨겨진 잃어버린 기회들과 억울한 사연을 이해하지 못하니 조직은 썩어간다. 곳곳에서 들리는 불평불만과 유혹적인 아이디어에 휘둘려서 방향을 잃어서 전략과 목표를 마구 바꾸면 생산 현장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유능한 경영자는 때로는 고집스럽게, 때로는 유연하게 전략 방향과 목표를 잡는다. 일하는 사람들은 (비록 힘들어도) 따라가면 이긴다는 믿음과 함께 내 생각이 전략으로 구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평범한 일상에서 기회를 찾아내고 전략 계획이 간섭하고 책임은 안 지는 궁정 정치가 되지 않도록 살핀다. 전략 계획이 무능한 경영자와 눈치만 보는 직원들이 펼치는 '바보들의 합창'이 되면 회사는 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