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후원한 야간 투시경이 아군 135명을 살렸습니다"

입력 2019.03.29 03:00

우크라이나 內戰 소셜펀딩 '쩐의 전쟁'

전투하다 말고 군복서 스마트폰 꺼내 '방탄조끼 간절' 톡톡
SNS 보낸 며칠 뒤 '비매품' 딱지 붙은 소포가 막사에
후원자 절반은 우크라 해외이민자… 실시간 전투 중계 등 "전쟁 부추겨" 비판도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 도네츠크. 이곳에선 지난 5년 동안 우크라이나군 대 친러시아 성향 분리주의 세력 간 끝 모를 내전이 이어지고 있다. 시내 곳곳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진다. 어느 날 밤 안드리 스코로코드 우크라이나군 대위는 어둠 속에서 분리주의자와 혈전을 벌이다 말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박격포탄을 피해 참호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군복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스마트폰을 꺼낸다. 그리고 온라인에 '보이지 않는 적을 찾아내기 위해선 열탐지 장비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투 준비가 한창인 군 막사 입구에 민간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대위님 어디 계시나요?" 한 금발 여성 민간인이 차에서 내려 대위를 찾으며 외쳤다. 그녀의 손에는 대위가 애타게 찾던 열탐지 장비가 수십개 들려 있다. 그날 밤 눈 덮인 전선 위로 어둠이 겹쳐 내리자 스코로코드 대위는 이제 막 뜯은 열탐지 장비를 총열에 장착하고 숨어 있는 적들을 속속 찾아내기 시작했다.

1 우크라이나 정부군 소속 자주포 2문이 진지를 옮기고 있다.
1 우크라이나 정부군 소속 자주포 2문이 진지를 옮기고 있다. 2 민간 군사펀딩 단체 피플프로젝트가 저격수들에게 필요한 조준경 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는 사이트. 3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분리주의 세력을 향해 야간 사격을 하고 있다. /블룸버그·피플프로젝트
도네츠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전선. 열기가 채 식지 않은 포탄 파편들을 자박자박 밟으며 어린 지원병들을 교육 중인 포병 교관 손에는 최신 태블릿 PC가 들려 있다. 우크라이나군을 후원하는 민간단체가 크라우드 펀딩으로 돈을 모아 사준 장비다. 이 태블릿에 깔린 군사 전술 프로그램은 구소련 장비를 가지고 싸우던 우크라이나군 처지를 안타까워한 민간 프로그래머들이 직접 짰다. 미국과 유럽에 사는 우크라이나계 이민자들도 태블릿PC 살 돈을 보탰다.

온라인으로 기부해 군수물자 지원

우크라이나 국민이 가난한 정부를 대신해 돈주머니를 풀어가며 내전 양상을 바꾸고 있다. 온라인으로 일정 금액을 기부하면 이 돈을 모아 정부군에 군수품을 사주는 크라우드펀딩(인터넷을 통한 대중 후원금 모금) 사이트에 돈이 몰린다.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는 못해도,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정부군 손에 새 무기를 쥐여주겠다는 '간접 참전' 방식이다.

5년 전 전쟁을 시작할 무렵 우크라이나군은 군수품이 부족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보유한 군수품으로는 우크라이나 육군 전체 병력의 7분의 1 수준인 6000명만 전투에 나설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강제로 병합한 데 따른 반발로 국민이 친러시아 성향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하야시키면서 통솔자까지 잃은 군대는 연일 분리주의 세력에 고전했다. 우크라이나 언론에 따르면 제대로 된 총조차 들고 있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적의 시체더미를 뒤져 무기를 구하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수술기구와 응급약품이 부족해 부상당한 병사들이 차가운 복도에서 죽어갔다.

우크라이나
이때 속수무책이었던 우크라이나 정부를 대신해 국민이 나섰다. 2014년 5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IT 프로그래머인 청년 비탈리 데이나하(Deynega)는 '무기가 없어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죽어간다'는 뉴스를 보고 친구 두 명과 힘을 모아 민간 군사 펀딩 기구 '살아 돌아오라(Come Back Alive)'를 만들었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모금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구 홈페이지 펀딩 계좌에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지원금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세워진 지 1년도 되지 않아 직원이 16명으로 늘었다. 2016년에는 직원이 45명으로 늘었고, 현재까지 약 500만달러의 크라우드 펀딩을 달성했다. 지원한 쌍안경과 야간 투시경, 의약품에는 단체 이름과 '비매품(Not for sale)'이라는 문구가 새겨진다. 도난이나 암시장에서 재판매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우크라이나 언론에 따르면 야간 전투에 나선 우크라이나군 가운데 이 기구가 지원한 투시경을 사용해 목숨을 구한 병력이 최소 135명에 달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군대'라는 별칭을 가진 피플 프로젝트(People's Project)도 대표적인 민간 군사펀딩 단체다. 이 시민단체는 온라인으로 후원받은 돈으로 의약품, 군복, 무기 등을 구입해 군대에 제공한다. 찢어진 방탄조끼를 입은 채 격전을 벌이던 병사들이 안타까웠던 설립자 아라카니아가 펀딩을 트위터에 홍보하자 첫 달에만 5만5000유로가 모였다. 후원자가 모바일 결제로 일정 금액을 기부하면 이 단체는 물품을 사서 전투 현장에 배달한다. 현장에 도착한 물품은 직접 사진을 찍어 후원자에게 확인시켜준다. 스타트업의 투자·제작·배송 프로세스와 엇비슷하다. 아라카니아는 "후원자가 우리를 신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크라우드 펀딩으로 후원받은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피플 프로젝트 웹사이트에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말한다. 우크라이나 학계 연구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우크라이나인은 부패한 정부보다 민간단체를 더욱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내전 크라우드 펀딩 개념도
지원 물자 사용내역 투명 공개

펀딩 사이트 통계에 따르면 정부군과 민병대를 후원하는 사람 중 절반은 해외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계 이민자다. 정치·경제적 위기를 맞은 조국을 오래전 떠나고서도 뿌리를 잊지 않은 이민자들은 페이팔, 머니그램, 웨스턴유니언 같은 글로벌 온라인 결제 서비스를 통해 군자금을 지원한다. 지원받은 단체는 수입과 지출에 대한 공개 보고서는 물론, 지원한 물품에 대한 꾸준한 추적 관리를 통해 지원자들로부터 믿음을 얻는다. 미국에 사는 우크라이나 이민자가 온라인 후원금을 내면 이 돈으로 산 군사 드론이 전송해주는 정찰 영상을 인터넷에서 중계해 주는 식이다. 후원받은 군수품을 착용한 군대가 분리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모습도 집에 앉아서 확인할 수 있다. 군대가 직접 소셜 미디어를 통해 후원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마크 갈레오티 뉴욕대 명예교수는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크라우드 펀딩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투에 참여한 일부분인 것처럼 느끼게끔 해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격렬한 군사적 대립 상황에서 새로운 경제적 후원 방식이 끼어드는 상황을 우려하기도 한다. 일부 사이트에는 러시아에 합병당한 크림반도 재력가들이 경쟁적으로 뭉칫돈을 내놓으며 전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돈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은 "돈 많은 사업가들이 군대를 사적으로 부리는 식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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