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촉천민 출신 입법·행정·사법 수장 수두룩… '교육이 곧 카스트'

    • 오화석 인도경제연구소장·배재대 교수

입력 2019.03.15 03:00

[오화석의 나마스테 인도 경제] (5) 권력자가 된 하층민들

오화석 인도경제연구소장·배재대 교수
오화석 인도경제연구소장·배재대 교수
지난해 인도 경제성장률은 7%대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률을 구가하는 나라다. 그러나 인도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어딘가 불편한 데가 있다. 신분 세습제인 카스트(Caste) 제도 때문이다. 인도에는 '모든 건 카스트 안에 있고, 카스트 밖에 있는 건 없다'는 속담이 있다. 그 뿌리가 견고하고 일상에 밀착해 있어 타파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현대의 카스트는 경제 발전과 함께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일전에 인도 고위 법관이 한국인들을 상대로 강연한 적이 있었다. 카스트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인도에 카스트로 인한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그러나 오늘날 인도에서 카스트 문제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이슬람과 힌두 갈등 등 종교 문제나 파키스탄과 겪는 갈등, 빈부 격차가 훨씬 심각합니다."

카스트제 개선 이후 권력 중심 이동

인도는 1947년 독립 후 1950년 카스트 악습을 뿌리 뽑기 위해 '보호를 위한 차별법(Protective Discrimination)'을 제정했다. 미국 '차별 철폐법(Affirmative Action)'과 유사한 제도로 최약자인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이 대학도 가고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20%를 특별 할당분으로 배정했다. 학자들은 이를 '20세기 인도 사회혁명'이라고까지 부른다. 그 뒤 천민 출신 대통령이 나오고 대법원장과 하원의장도 탄생했다.

실제 지난 1996년 이후 선거는 인도 권력이 상층 카스트에서 하층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인구가 많은 우타르프라데시주나 비하르주에서는 천민 출신이 행정부와 의회를 석권했다. 천민 출신으로 연방 정부 장관이나 주 총리, 유명 정치인, 대법원장이나 대통령 등 최고위층에 올라선 인물이 속속 등장했다.

람 나트 코빈드(Kovind) 현 대통령을 비롯, 메이라 쿠마르(Kumar) 하원의장, K.G. 발라크리슈난(Balakrishnan) 대법원장이 천민 출신이다. 2005년 말 타계한 코체릴 라말 나라야난(Narayanan) 전 인도 대통령, 2000~2002년 인도 집권당이었던 BJP 방가르 락스만(Laxman) 전 총재, 현 소비자부 람 빌라스 파스완(Paswan) 장관, 비하르주 람 순데르 다스(Das) 전 총리도 마찬가지다.

독립 후 인도 초대 법무장관을 지낸 암베드카르(Ambedkar)는 '불가촉천민의 영웅'이다. 인도에 가면 '인도 독립 영웅' 간디의 동상 못지않게 자주 볼 수 있는 게 암베드카르 동상이다.

현재 인도에서 매우 강력한 정치인 중 하나인 쿠마리 마야와티(Mayawati) 우타르프라데시주 총리도 천민 출신이다. '인도 천민의 여왕'이라는 그는 차기 연방 총리를 넘보고 있다. 대통령, 대법원장, 연방 장관, 대학 총장 등 고위직에 오른 천민 출신이 많지만 권력 정점인 연방 총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가 된다면 인도 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 될 전망이다. 그는 타고난 화술과 리더십으로 천민을 넘어 브라만, 무슬림 등과 카스트 연합 전략을 자주 펼치면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육이 신분 상승 발판

이 천출(賤出)들이 성공한 바탕에는 '교육'이란 공통분모가 있다. 교육을 통해 신분을 뛰어넘었다. 인도에서 교육은 신분 상승과 함께 경제력을 가져다 주는 첩경이다. 교육이 '현대의 카스트'란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인도 카스트는 서구식 계급제도(class)로 옮아가고 있는 셈이다. 신분 상승 욕구가 큰 천민들은 교육에 필사적이다. 최근 정보기술(IT) 열풍은 이런 교육열에 불을 붙였다. IT 기업에 취직하면 신분 탈출은 물론 돈과 명예가 따라온다. 인도 최고 고등 교육기관인 인도공과대학(IIT)이나 인도경영대학원(IIM) 등에 입학하기 위해 천민 계급 청소년들은 사활을 건다.

인도는 카스트를 영구 추방하기 위해 산업화와 도시화에 매진하고 있다. 인도는 1991년 경제를 개방했지만 아직 제조업 성장세는 느리다. 서비스업 위주로 경제성장이 이뤄진다. 카스트를 추방하려면 서비스업보다 제조업 발전을 이뤄야 한다. 도시 주변에 대규모 공장들을 세워 수많은 농촌 하층민을 도시로 끌어들여야 농촌에 뿌리 깊게 남은 카스트 문화가 해체될 수 있다. 국민소득이 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자아와 권리 의식이 고양되고 진정한 카스트 해체가 가능해진다.

고전하는 상층 카스트 계급

하층 계급에게 교육 기회와 공무원 자리를 보장해준 '보호를 위한 차별법'은 이후 4대 카스트 중 가장 낮은 수드라에게도 확대됐다. 인도 인구의 약 40%를 점하고 있는 이들은 '여타 하위 카스트(OBC·Other Backward Castes)'로 불린다. 이들은 자신들이 상층 카스트에게 차별받고, 불가촉천민들에게도 역차별당하고 있다며 특혜를 나눠달라고 반발했다. 결국 정부는 이들 요구를 받아들여 약 30% 공직과 공립 학교 입학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자 브라만 등 상층 카스트 설 자리가 좁아졌다. 하층 카스트에 대한 공직 할당이 많은 곳은 70%에 이르는데 공직이나 공립대 50~70%를 하층 카스트로 먼저 채우고 난 뒤 나머지를 두고 상층 카스트가 다퉈야 하므로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다. 이로 인해 사회적 약자로 밀려나는 상층 카스트가 빠르게 늘고 있다.

아무리 높은 카스트로 태어났다고 해도 교육을 못 받고 돈이 없으면 경제적·사회적 하위 계층으로 전락한다. 판디트(pandit)는 브라만 가운데서도 최상위 계급이지만 돈이 없어 청소부나 가정부를 하는 이가 적지 않다. 원래 천민이나 해온 일이다. 뉴델리 사회발전연구센터(CSDS)가 2007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브라만 가계의 50%가 한 달 평균 소득이 4000루피(약 8만원) 이하였다. 도시 운전기사 월급이 1만루피(약 20만원)가 넘던 시절이다.

수도 델리에는 술라브 샤우차라야(Sulabh Shauchalayas)라 불리는 공중화장실이 50여개 있는데 청소부는 모두 브라만이다.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델리로 이주했는데 일자리가 없다 보니 청소부라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델리 철도역 근처에서 일하는 쿨리(짐꾼)와 인력거를 끄는 릭셔왈리(인력거꾼) 중에도 브라만 출신이 적지 않다. "오늘날 브라만 지위는 불가촉천민 못지않게 추락했다"는 외신 기사가 나올 정도다.

물론 여전히 사회적 존경과 경제적 성공을 함께 이룬 브라만이 많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와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는 브라만 출신이다. 사제 외에 고위 공무원, 법관, 교수, 기업인, IT(정보 기술) 전문가, 의사, 회계사 등 상류 계층으로 남아 있는 브라만이 많다.

하지만 적잖은 브라만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고, 사회적 지위가 추락하고 있다. 정부가 하위 계급에 부여하는 특혜가 큰 역할을 했고, 최근 경제 개방에 따른 산업화도 브라만의 몰락과 카스트의 분열을 촉진하고 있다.

Knowledge Keyword : 카스트(Caste) 제도

인도 카스트는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왕·귀족), 바이샤(상인·지주), 수드라(농민·수공업자·노예) 등 크게 4계급으로 이뤄진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등 상층 3계급만 인간적 대접을 받았다. 이 4계급에도 속하지 못하고, 수드라보다도 못한 최하층은 '불가촉천민(Untouchables)'이라 부른다. 불가촉천민은 자신을 '억압받는 자'라는 뜻으로 '달리트(Dalit)'로 부른다. 과거엔 불가촉천민 다리에 종을 달아두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들이 접근해 오면 종소리를 듣고 피하기 위해서다.

인도 카스트 계급별 인구 구성
[카스트가 비즈니스에 영향? 韓 기업 대부분 "거의 못느껴"]

카스트는 인도에서 사업할 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일반적으로 카스트는 인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데 방해가 되고, 인도 경제성장에 중요한 제약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카스트가 인도에서 사업하는 데 거의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영 컨설턴트인 라마 비자푸르카르는 "카스트와 비즈니스, 카스트와 인도 소비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서 "카스트는 정치적 투표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비즈니스나 소비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카스트와 경제성장에 관해서도 그는 "과거 인도 비즈니스는 상인 계급인 바이샤가 주도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사람, 모든 카스트가 경제활동에 매진하는 바이샤"라며 "오늘날 카스트는 경제성장 측면에서도 저해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인도경제연구소가 2014년 인도에 진출한 한국 기업 6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카스트 인식 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 조사에 따르면 60곳 중 54곳이 인도에서 회사를 경영하면서 "카스트를 직접 느끼지 못했다"고 밝혔다. 55곳은 "카스트와 비즈니스가 거의 관계가 없다"고 답변했다. 60기업 중 5곳만이 "카스트 제도로 인도인 직원 간 명령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으나 구체적 사례는 제시하지 못했다.

삼성전자 인디아소프트웨어연구소(SISO) 인사 관계자는 "회사 내에 천민 출신 엔지니어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그러나 카스트가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으므로 직원들의 카스트에 대해 아예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인도에서 사업할 때는 카스트(계급)를 잊고 클래스(계층)를 기억하라고 조언한다. 인도는 상층, 중산층, 하층, 극빈층 간 구분이 뚜렷해 비즈니스의 타깃을 분명히 정해 공략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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