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넘어 이어지는 정책을 세우는 비결

    • 김현철 코넬대 정책분석학과 교수

입력 2019.03.15 03:00 | 수정 2019.03.19 23:12

[On the Policy]

1995년 빈곤정책 설계 맡은 멕시코 차관
'증거 기반 성과 평가' 통해 연속성 보장
한국도 최저임금 등에 도입 검토해야

김현철 코넬대 정책분석학과 교수
김현철 코넬대 정책분석학과 교수·아시아개발은행 효과평가 자문관
1995년 멕시코 재무부 산티아고 레비 차관은 새로운 빈곤 정책을 설계하는 책임을 맡았다. 보스턴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그는 학자로서 전문성을 활용해 당시로선 혁신적인, '프로그레사(PROGRESA)'로 이름 붙인 조건부 현금 급여(Conditional Cash Transfer) 사업을 설계했다. 빈곤층에게 무조건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아니라 자녀 예방접종을 완료한다든지,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방만한 사업비를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경제학자다운 발상이었다.

레비 차관은 이 정책이 성공할 거라 확신했지만 고민은 있었다. 정권이 바뀌면 그때마다 새로 만드는 악순환이 벌어질까 봐 걱정했다. 이를 차단하려면 정책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알려야 했다. 그러면 새 정권도 함부로 기존 정책을 폐기하지 못한다고 봤다. '성과 평가(impact evaluation)를 통한 증거 기반 정책(evidence-based policy)'이 태동한 계기였다.

성과 평가를 기반으로 정책 도입 결정

레비 차관은 무작위 통제를 통한 사회 실험을 통해 프로그레사가 실제 얼마나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 조사했다. 정책을 적용할 지자체나 개인을 무작위로 선정해 사업을 진행한 다음, 그렇지 않은 집단과 비교하는 작업이다. 멕시코 정부는 대상 지자체 506곳 중 320곳을 무작위로 선정한 뒤 성공적이라고 판단되면 남은 186곳에 이를 확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프로그레사는 성공적이었다. 국민들이 최소 소비 수준을 유지하면서 장기적으로 빈곤을 극복하는 의미 있는 변화가 포착됐다. 취학률은 증가했고, 질병이 감소했으며, 키·몸무게가 늘었다. 사업 관리 비용도 줄었다. 멕시코가 실험한 조건부 현금 급여 복지 정책은 국제 사회 주목을 받아 니카라과, 콜롬비아, 칠레, 온두라스, 브라질, 페루를 비롯해 아프리카 말라위와 잠비아까지 퍼져 나갔다. 차기 정부도 프로그레사를 오퍼투니다데스(Oportunidades)라고 이름만 바꿨을 뿐 골격은 유지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엄밀한 성과 평가가 이뤄지면서 정책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영향이 컸다.

핀란드 역시 기본 소득(basic income) 정책 도입을 놓고 같은 실험 방법을 쓰고 있다. 25~58세 실업자 중 2000명을 무작위로 선정, 2년간 매월 560유로를 보장한 뒤, 선정되지 않는 사람과 취업률, 건강, 삶의 만족도에 대한 차이를 측정하는 것이다. 실험 결과, 기본 소득 수령자들은 스트레스를 덜 받고 더 건강하며 장래에 대한 자신감이 높아졌다. 반면 취업 일수에는 변화가 없었다. 핀란드 기본 소득 실험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판단은 아직 이르다. 다만 이런 사회 실험이 있었고 그 결과를 국민이 공유하면서 기본 소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채택해야 할지에 대해 국민이 더 깊이 이해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다르다. 당위와 직관에 의존해 톱다운 방식으로 정책을 강요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 방식이다.

한국에서 시행하는 청년 수당을 생각해보자. 청년 수당을 지급하면 취업에 도움이 될까. 막연하게 제도 도입 전후 실업률만 비교해 수당 지급 효과를 측정한다면 그 차이가 그 기간 동안 지속된 경제 상황 때문인지 청년수당 덕인지 알기 어렵다. 통제된 사회 실험을 거쳐야 하는 이유다. 우리나라도 작년 최초로 기획재정부 산하에 정책 실험실(policy lab)을 만들어 신규 정책 추진 여부를 판단할 때 사회 실험을 거치는 '증거 기반 정책'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늦은 감은 있지만 긍정적 변화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근로시간 단축, 기본 소득 같은 논란이 많은 정책은 이런 실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해서 벌어지는 논란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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