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기업을 반석에 앉힐 것이냐… 몰락의 길로 내몰 것이냐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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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1.25 03:00

      [이한우의 논어 제왕학] (2) 조선 태종 이방원의 '강명(剛明)'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굳센 마음, 미래를 준비하는 밝은 눈'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논어등반학교장
      "어찌 내 배에서 나오지 않았던고(何不爲吾出乎)!"

      이 탄식은 어릴 때 이방원(李芳遠)이 과거를 준비하느라 글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계모 강씨(康氏)가 했다는 말이다. 남편 이성계를 도와 개국에도 공을 세울 정도의 여걸이었던 강씨로서는 청년 이방원의 군덕(君德)을 미리 보았기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방원의 군덕, 즉 임금이 될 만한 품성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굳셈과 눈 밝음, 곧 강명(剛明)이다. 이 점은 여러 사람의 발언으로 입증된다. 태조 이성계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빼앗겼고 이어 상왕으로 있다가 다시 정종(定宗)이 동생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장면을 아버지로서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 정종이 왕세자 혹은 왕세제 이방원에게 권력을 넘기는 교서(敎書)에도 강명이 등장한다. '왕세자는 강명한 덕을 타고났고 용맹과 지략의 자질이 빼어났다. 인의(仁義)는 태어날 때부터 가졌고 효제(孝弟)는 지성(至誠)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해서 권력이 사실상 방원에게 넘어갔다고 하자 아버지 이성계는 모든 것을 포기한 가운데서도 이렇게 말한다. "강명한 임금이니 권세가 반드시 아래로 옮아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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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유현호
      강명했던 이방원, 못했던 이성계

      이처럼 조선 초 때 강명(剛明)이란 말할 것도 없이 임금이 갖춰야 할 품성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성계 자신은 강명한 임금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스스로가 밝힌 그대로다. 많은 권세가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에게로 옮아가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왕권 중심에 반대해 군신공치론(君臣共治論)을 내세웠던 정도전은 바로 이 임금의 강명을 문제 삼았던 장본인이다.

      군주 국가에서 모든 임금이 다 강명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재상(宰相)이 지속적으로 권력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그의 재상 중심주의다.

      정도전은 스스로를 한나라 유방(劉邦)의 참모 장자방(張子房·장량)에 비유하며 술에 취해 "한고조가 자방을 이용한 게 아니라 자방이 고조를 이용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깊은 마음속에 위를 넘보는(犯上)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논어' 학이(學而) 편에는 이처럼 위를 넘보려는 신하를 경계할 필요성을 지적하는 공자의 제자 유자(有子)의 말이 실려 있다. "그 사람됨이 효도하고 공순하면서(孝弟) 윗사람을 범하기(犯上)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또)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야 도리가 생겨난다. 효도와 공순은 어짊(仁)을 행하는 근본이라 할 만하다." 이처럼 마음속으로 윗사람을 타고 넘으려는 아랫사람을 미리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눈 밝지 못한 것(不明)이고 알면서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굳세지 못한 것(不剛)이다. 태조 이성계는 강명하지 못했고 그 결과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최악의 불명예까지 안아야 했다.

      공(公)에 어긋나면 가신도 숙청

      강(剛)은 강(强)과는 다르다. 내면적인 강(剛)의 반대는 유(柔)이고 외면적인 강(强)의 반대는 약(弱)이다. 굳셈(剛)은 곧 한결같음(一)이다. 이랬다 저랬다 해서는 굳세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신하들의 범상(犯上)을 용납하지 않는 것 또한 굳셈의 일부다.

      먼저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의 굳셈은 개국공신이자 1, 2차 왕자의 난 공신인 이거이(李居易)를 단호하게 처리하는 데서 나타났다. 사돈이기도 했던 이거이가 정종 때 사병 혁파에 불만을 표시하자 집권 직후 단호하게 숙청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고 훗날 명예는 회복시켜 주었다. 이숙번 또한 공신 중의 공신이었지만 자신에게 몽니를 부리자 가차없이 지방으로 유폐했다.

      태종은 종묘사직을 반석에 올리는 일을 자신의 최대 과제로 여겼다. 왕권 강화를 위해 의정부를 무력화하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관철했다. 또한 정도전과 달리 왕권 강화론을 수긍하는 하륜을 오랫동안 중용해 왕권을 반석에 올렸다. 태종과 하륜은 그런 점에서 유학 정치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의 만남이었다.

      태종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似而非) 임금이 세조다. 종묘사직 수호라는 명분이 강하지 못했다. 사사로운 권력욕으로 일을 서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신이나 재상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빈번하게 술자리를 베풀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이 같은 세조의 정치 스타일을 '주석(酒席) 정치'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단종 복위를 위한 움직임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사육신 사건까지 터졌다. 친형제 금성대군 또한 사약을 내려 죽였다.

      태종은 개인적으로 도교를 신봉했지만 공적으로는 유학을 중시하는 움직임을 견지했다. 반면 세조는 불교를 신봉해 불교를 비판하는 유학자들의 간언을 그냥 두지 않았다. 태종은 후대를 설계할 때도 세자 양녕이 실덕(失德)하자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뛰어난 이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택현론(擇賢論)을 따라 셋째 아들 충녕에게 왕위를 넘기고 4년 동안 상왕으로 있으면서 새로운 임금의 정치력 성장을 도왔다. 이 또한 크게 종묘사직을 생각하는 굳센 대계(大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 세조는 그런 미래 준비가 없었고 그를 이은 예종은 어설픈 왕권 강화를 추구하다 단명했다. 어린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으며 조선 왕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조가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했을 뿐 자기 후대의 미래를 위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은 현실적 결과다. 태종과 달리 세조를 굳센 임금(剛君)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기껏해야 강군(强君)이었다.

      세종 양위 전에 위협세력 미리 정리

      태종은 미래의 그림을 먼저 그린 다음에 현재 국면을 만들어가는 통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처남 민씨 형제들을 처리한 것도 실은 양녕이 다음 임금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한 선제적 조치였다. 유감스럽게도 양녕은 결국 왕위를 잇지 못하고 충녕이 뒤를 이었다. 이때에도 태종은 다시 미래의 그림을 그린다. 충녕의 왕위를 흔들 수 있는 잠재적 위협 세력으로 세종의 처가인 심씨 집안을 지목했다. 결국 세종의 장인 심온은 처형당했고 장모는 관비가 됐으며 심씨 집안은 초토화됐다.

      우리는 흔히 이것만 두고서 그를 잔혹하다고 평한다. 그러나 태종은 머릿속에 '논어'와 더불어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및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넣고 살았던 임금이었다. 세 책의 공통점은 모두 강한 왕실과 강명한 임금상(像)이다. 특히 '한서' 앞부분에는 왕실인 유씨(劉氏)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유방의 부인 여후(呂后) 집안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는 태종이 민씨나 심씨를 견제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한 채 태종이 권력을 남용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태종에게 숙청의 빌미를 제공한 민씨나 심씨의 안일한 대응 또한 함께 짚어낼 때 왕권 강화를 향한 태종의 눈 밝은 일처리를 온전하게 파악하고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태종의 이런 눈 밝은 선제적 조치가 세종의 태평성대를 낳았고,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세종의 안이한 일 처리가 결국은 손자 단종의 비극적 죽음뿐만 아니라 세조의 찬탈과 사육신의 죽음으로 이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낭만적 연극 한 판이 아니라 살벌한 전쟁터다. 오늘날 기업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명(剛明)을 잃은 리더는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