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월스트리트의 특명 "브렉시트로 혼란한 유럽을 정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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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1.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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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런던의 금융 지구 카나리 워프 전경. 미국의 시티그룹, 영국 HSBC홀딩스, 바클레이스 등 글로벌 은행들의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 있다. 금융사들은 브렉시트를 앞두고 런던의 사무실과 인력을 주변 유럽 국가로 옮기고 있다. / 블룸버그·게티이미지
      RBS(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에 속했다. 그러나 지금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극단적으로 '쪼그라든' 유럽 은행의 대표적 사례가 됐다. RBS는 금융위기 이후 정부의 장기 구조조정을 거치며 자산 규모가 60% 감소하고 직원 수도 70% 줄었다. 결국 RBS는 부활하지 못했다. 2017년 RBS의 은행업계 순위는 20위권 밖으로 밀려나며 추락했다.

      '유럽 은행 산업이 쇠퇴하고 있다'는 소식이 쏟아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유럽 은행들의 경쟁력은 크게 후퇴한 반면, 미국 은행들은 크게 번성해 세계 자본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분석들이다. 여기에 더해 유럽 금융가에선 오는 3월로 예정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파에 대한 우려도 크다. 지금도 단일성이 부족한 유로존 내 금융 시장이 한 번 더 쪼개지는 결과를 낳아 유럽 은행 경쟁력에 '악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 은행들은 브렉시트를 세력 확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로 보고 부지런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런던을 제외한 새로운 유럽 내 거점을 확보하며 유럽 사업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미국 은행들에 브렉시트가 유럽 시장을 '정복'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세계 10위권, 유럽 6개서 3개로 반토막

      금융위기 이후 유럽과 미국 은행의 판세 변화는 세계 은행 순위 변화로 극명히 드러난다. RBS뿐만 아니라, HSBC홀딩스, 바클레이스, 도이체방크 등 유럽의 명실상부한 대표 은행들이 금융위기 이후 속수무책으로 미국과 중국 은행들에 밀려났다. 금융 전문지 '더 뱅커' 집계에 따르면 2007년 자본 규모를 기준으로 세계 10위권 은행 내에 유럽 은행은 6개였지만, 2017년엔 HSBC홀딩스, BNP파리바, 크레디아그리콜 등 3개만 남았다. 10위권 내 미국 은행은 네 곳으로, 유럽 은행 세 곳을 모두 앞질렀다. 나머지는 중국 국영 은행들이 차지했다.

      유럽 은행들은 덩치뿐만 아니라 수익 규모에서도 크게 추월당했다. 파이낸셜타임스 집계에 따르면 유럽의 상위 5개 은행인 HSBC홀딩스, RBS, BNP파리바, 바클레이스, 도이체방크는 지난 2007년 60억달러에 가까운 순이익을 올렸다.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시티그룹,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등 미국의 상위 5개 은행 수입의 합보다 20% 많았다. 그러나 2017년 이 5개 유럽 은행들의 순이익은 총 17억5000만달러로 급감했다. 같은 해 JP모건체이스가 홀로 벌어들인 24억4000만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금융위기가 '변곡점'이 돼 미국·유럽 은행 산업의 '운명'을 갈랐다고 설명한다.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각 국이 내놓은 정책의 차이, 은행업에 대한 규제 수준, 경제 회복을 위한 저금리 정책의 영향이 미국·유럽 은행의 희비를 갈랐다는 분석이다. 도이체방크의 파울 아흘라이트너 회장은 파이낸셜타임스에 "미국 정부는 금융위기 이후 미국 대형 은행들이 연준의 스트레스 테스트(심각한 경기 하강기를 견뎌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은행 재무건전성 시험)를 통과할 때까지 정부 자금을 강제로 투입하고 적극 개입함으로써 산업 구조를 바꾸고 시스템을 완전히 안정시켰다"며 "반면 유럽에서는 그와 같은 것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미국과 달리 유럽이 은행업 규제를 강화한 것도 수익성을 악화시켰다. 대부분 유럽 국가들은 은행에 강화된 투자자 보호법, 보너스 상한제 등을 적용했다. 보너스 상한제는 유능한 금융 분야 인재들이 탈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례 없이 낮은 기준금리도 유럽 은행들에 타격이 됐다. 유럽의 경우 경제 회복세가 미국보다 느린 탓에 낮은 수준의 금리가 오랫동안 지속되며 은행 이자수익을 갉아먹었다. 구조적으로 유럽 은행은 미국 은행보다 이자 수입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기 때문에 여파도 컸다.

      美, 유럽 대형 거래 6개 중 5개 주도

      유럽 금융계가 우려하는 더 큰 걱정거리는 미국 은행들이 유럽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유럽 자본시장에서의 지배력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년 유럽에서 5억달러 이상 60억달러 미만 규모의 거래를 성사시킨 투자은행 상위 6개 중 5개가 미국 은행인 것으로 블룸버그는 집계했다. 유럽 기업들이 대규모로 자본을 늘리고 인수·합병 등을 하기 위해 미국 은행을 더 많이 이용했다는 뜻이다.

      JP모건의 한 전직 임원은 "유럽이 국제 자본을 이용하는 데 지역 경제와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는 미국 은행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라고 밝혔다. 프레데릭 우데아 소시에네제네랄 최고경영자(CEO)도 "이런 식이라면 미국 은행들이 유럽에서 과점 체제를 형성하는 날도 그리 멀지 않은 일"이라며 "그럴 경우 미국 은행이 갑자기 채권 발행 등에 대한 수수료를 30%씩 올리더라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다시 한 번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질 경우 유럽 기업들이 단숨에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유럽 은행이 다시 경쟁력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지만 전망이 밝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선 자본을 확충하고 좋은 인재를 영입하며 기술 투자에 나서야 한다. 그러나 유럽 은행의 수익성이 낮아 그럴 여력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이미 유럽의 많은 은행이 기술 투자 부진으로 디지털화(化) 경쟁에도 뒤처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美, 프랑크푸르트·더블린 등 거점 확대

      유럽 은행이 미국 은행에 대항해 경쟁력을 되찾기 위한 또다른 방안으로 거론 되는 것은 유럽 내 단일 금융 시장 형성이다. 미국 은행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단일 시장을 바탕으로 덩치를 키우고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반면 유로존에는 모든 유럽연합 국가에서 영업을 하는 '범유럽' 은행이 한 곳도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금융협회 회의에 참석한 유럽의 은행장들은 "미국 은행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선 '범유럽 차원의 대형 은행'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유럽의 단일 금융 시장을 만들자는 '유로존 은행연합' 구상은 추진에 난항을 겪고 있다. 또 몇 달 앞으로 다가온 브렉시트는 유럽의 금융 시장을 더욱 분열시킬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 때문에 브렉시트가 되레 유럽에서 미국 은행들이 점유율을 늘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글로벌 캐피탈 회사인 재너스 헨더슨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배링턴 밀러는 "미국 은행이라면 바로 이때 유럽에서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뻥 뚫린 '활주로'를 찾아 나서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미 많은 미국 은행들이 브렉시트를 앞두고 유럽 조직을 강화하는 추세다. 미국의 뱅크오브아메리카,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은 프랑스 파리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아일랜드 더블린 등에 거점을 마련했으며 유럽 직원을 보강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결과적으로 미국 은행들이 유럽에 점점 더 깊이 침투하게 됐다"며 "브렉시트는 유럽의 금융 산업을 절반으로 갈라 놓고 미국 은행들이 유럽 은행들을 상대로 추가 득점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