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혁신 생태계를 절대 '창조' 못한다, 지난 정부 '창조경제센터'를 보라

입력 2018.12.28 03:00

창업·혁신 생태계 만들려면

연세대 전문가 토론회
스탠퍼드大 바넷 교수 “천재는 실패 많이 해 재창업률 높아야”
OECD 제키니 의장 “혁신도시 공통점은 기업가 세심하게 지원하는 정부 있어”

한국 정부가 경제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 혁신 성장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세계의 혁신·창업 전문가들이 연세대에서 토론회를 가졌다. 전문가들은 실패를 용인하고 정부가 세심하게 배후 지원해야 혁신과 창업의 풍토가 조성된다고 강조했다. /게티이미지
"한국 KAIST(한국과학기술원) 학부생들 중 창업을 꿈꾸는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면 중국은 8%가 넘는다고 한다. KAIST 졸업생들은 대개 조용히 대기업·국책 연구소에 안착하거나, 의대 아니면 금융권 진출을 노린다." 이지환 KAIST 교수가 전한 현실이다.

창업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정부 노력에도 여전히 한국 창업 생태계는 취약하다. 혁신 스타트업을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지난 14일 연세대에선 '글로벌 콘퍼런스: 기업가 생태계'란 제목으로 전 세계 전문가들이 모여 이런 화두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윌리엄 바넷(Barnett) 미 스탠퍼드대 교수, 살바토레 제키니(Zecchini) OECD 기업가정신 워킹그룹 의장, 가오 쉬동 중국 칭화대 교수, 미하엘 보이보데(Woywode) 독일 만하임대 교수가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이 교수는 "재창업률이 높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창업률은 한 번 창업한 후 실패했다 다시 창업하는 비율을 가리킨다. 창업에 실패한다고 낙오자로 전락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기회가 원만하게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①혁신, 처음엔 어리석어 보인다

바넷 교수에 따르면 실패는 천재들이 치르는 대가다. 위대한 회사가 희귀한 까닭은 사람들이 천재가 되려고 모험하기 보단 바보로 끝나지 않으려고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남들이 합의하지 않는(non-consensus) 게 많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합의하는(consensus) 아이디어가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비합리적인, 어리석게 보이는(foolish) 아이디어를 추구하라. 물론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성공한다면 그건 산업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다.

기업사에 획을 그은 스타트업들도 처음부터 혁신적이라고 인정받은 곳은 많지 않다. 구글은 창업 초기 투자 유치에 애를 먹었다. 이미 라이코스나 알타비스타 같은 경쟁사들은 실패를 맛본 뒤였다. 실리콘밸리에선 검색은 더 이상 사업모델로 쳐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바넷 교수는 "페이스북 초창기부터 마크(저커버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페이스북을 두고 학생들과 사례 연구를 한 적이 있다"면서 "그런데 학생들은 페이스북을 싫어했다"고 전했다. 수익모델이 변변치 않다는 이유였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1996~2000년 사이 당시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를 '최악의 리더' 중 하나로 꼽은 적이 많았다.

②정부, '창조자' 아니라 '촉진자'

기업가들이 지역 기반 혁신 생태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제키니 의장은 "성공한 혁신 도시 공통점은 기업가를 어떻게 언제 지원해야 하는지 아는, 능력 있고 세심한 정부가 있었다"고 말했다. 요지는 정부는 혁신 생태계를 절대 '창조'하지 못한다는 점. 다만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을 뿐'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정부가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하면 생태계 형성에 장애가 될 뿐이다. 지난 정부 창조경제센터가 실패한 것도 이런 이유다. 제키니 의장은 "실리콘밸리는 실콘밸리만의 특성이 있다"면서 "실리콘밸리를 베끼려 하지 말고 그 나라 특성에 맞는 고유의 창업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정부가 창업 지원을 할 때 곧잘 재무적 가치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이에 대해 박상인 서울대 교수는 "창업 지원을 하면서 정부는 자꾸 점쟁이처럼 승자를 맞히려고 하는데 그런 사고방식으론 혁신 생태계가 생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살바토레 제키니 OECD 기업가 정신 워킹그룹 의장, 가오 쉬동 중국 칭화대 교수, 미하엘 보이보데 독일 만하임대 교수, 이지환 KAIST 교수(왼쪽부터). /연세대
③민·관·학 집적지를 설계하라

독일에선 대학과 혁신 기업·대기업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개방형 이노베이션' 체제를 갖춘 집적지(cluster)가 수십 곳 활약하고 있다. 대표적인 도시로 하이델베르크가 있다. 스타트업과 함께 연구개발(R&D) 등을 협력하는 SAP·머크·바스프·로슈 등 대기업, 9개 대학과 연구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통 신기술을 하나 개발할 때는 엄청난 지원이 필요하다. 한 회사, 한 연구소가 혼자 만들어 낼 수 없는 시대다. 다양한 기관과 지방 정부, 크고 작은 기업이 긴밀하게 협조할 때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이 탄생할 수 있다.

④R&D 투자가 미래 성장 밑거름

가오 교수는 "다들 중국 경제성장 둔화를 많이 걱정하지만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이 그 공백을 메우고 다시 도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년 전 중국 후난성에선 57층 건물을 19일 만에 지은 건설회사가 있었다. 그들은 3개층 철강재를 한 번에 접합하는 신기술을 개발해 놀라운 건축속도를 구현했다. 선전의 한 스타트업이 출시한 인공피부는 선진국 제품과 비교해 품질은 뒤지지 않지만 값은 8분의 1이다. 칭화대는 MIT보다 많은 8000여개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뉴런 연구에서는 명실상부한 세계 1위다. 그 저변에는 어마어마한 연구개발 투자가 자리 잡고 있다. 화웨이 한 곳에서만 1년에 R&D에 90억위안(약 1조4000억원)을 쏟아붓고 있다. 정부가 벌이는 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매년 중국에선 800만명에 달하는 대학 졸업생이 배출된다. 이런 구조가 창업 생태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셈이다.

⑤대기업 수직계열화를 해체하라

한국에서 경제발전은 '재벌체제'와 동의어였다. 한국 재벌들은 모방 속도전에서 탁월했다. 그러나 이젠 모방에서 혁신 기반 경제로 옮아가야 한다. 그 걸림돌 중 하나로 대기업 중심 수직계열화가 꼽힌다. 수직계열화를 통한 성장은 개발경제 시대엔 효율성이 높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떨어진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외부 IT 기업이나 스타트업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력관계를 잘 갖춰야 인건비 부담도 줄이고 혁신 기술 개발에 더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를 보자. 현대차는 오랫동안 한국 자동차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하도급업체들을 수직적으로 통합하고 정실관계로 묶인 계약 관행 속에 경쟁 구도를 회피했다. 이러다보니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첨단기술과 커넥티드카를 둘러싼 글로벌 자동차 업계 제휴 관계도를 살펴보면 현대차는 마치 국제 사회에서 북한과 같은 존재다. 이제 변해야 할 시간이다.

놓치면 안되는 기사

팝업 닫기

WEEKLY BIZ 추천기사

Focus

더보기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