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의 시대는 갔다… 소비자 빅데이터 이용해 가변적 가격 정책을"

입력 2018.12.14 03:00

가격 결정 이론의 대가 마크 반휄레 HEC 교수

시장이라는 전장에 나가는 기업에 가격 정책은 '야전 교본'이다.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패배할 가능성이 커진다. 원칙대로 하는 게 정석이긴 하지만 때론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시장 상황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같은 제품이라고 어디서든 같은 가격을 받으라는 법은 없다. 이윤을 극대화하려면 국가, 지역, 시간대에 따라 다른 가격 정책을 짜는 게 좋다. 이미 소비자들은 온라인에서 검색한 가격 정보로 무장하고 기업이 제시한 가격을 언제든 퇴짜놓을 수 있다.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사려는 소비자와 어떻게든 이윤을 더 붙여 팔려는 기업 간 두뇌 싸움이 치열해진다.

이런 시대 기업은 어떻게 가격 정책을 설계해나가야 할까.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가격 결정 이론 대가 마크 반휄레(Vanhuele) HEC(파리공립경영대학원) 교수를 지난달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기업이 같은 제품 가격을 자주 바꾸면 소비자 신뢰도가 떨어지고, 결국 소비자가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변적 가격 정책(dynamic pricing)은 예상 밖 효과를 가져오며, 대체로 기업을 성장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2011년 마케팅 부문에서 신텍(Syntec) 경영컨설팅상을 받았고, 저명한 국제 저널인 소비자조사연구(Journal of Consumer Research) 수석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

디즈니, 獨·英·佛에 다른 가격 적용

1992년 문을 연 프랑스 파리 디즈니랜드는 2010년대 들어 심각한 경영난에 접어들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독일을 제외한 유럽 전역이 경제난에 휩싸이면서 유럽권 관광객 발길이 뚝 끊긴 탓이다. 파리 디즈니랜드를 운영하는 유로디즈니는 2015년부터 손님을 불러모으기 위해 실험을 하나 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입장권을 살 때 국가를 선택하게끔 시스템을 바꾸고, 국가별로 가격을 정하게 한 것. 국기를 누르면 해당 국가 언어로 홈페이지가 바뀌는 서비스처럼 보였지만, 이보다는 가격을 다르게 받기 위한 전략에 가까웠다.

경제 위기 여파가 작았던 독일을 선택한 독일어권 관광객들은 숙박권과 일부 식사가 포함된 프리미엄 패키지를 1900유로(약 240만원)를 주고 사야 했다. 반면 영국인을 포함해 영어를 선택한 관광객에게는 같은 패키지를 1450유로(약 190만원)에 팔았다. 파리 디즈니랜드를 가장 많이 방문하는 프랑스 자국인들에게는 1050유로(약 135만원)만 받았다. 놀이동산에 한번 와본 관광객을 다시 찾게 하기 위해선 파격적 가격 정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어권 관광객들은 경제지표가 상대적으로 우수하고, 파리 디즈니랜드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인들보다 최고 80% 가까이 많은 돈을 내야 했다.

이후 '프랑스어를 고르면 가격이 가장 싸다'는 사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공공연히 퍼지자, 유로디즈니는 가격 정책을 바꿨다. 파리 디즈니랜드와 기차로 이어지는 영국권 관광객, 아시아권 관광객을 겨냥해 영어를 선택한 소비자에게 가장 싼 가격 정책을 제시한 것이다. 유로디즈니는 이미 디즈니랜드를 두세 번 찾은 프랑스인들 발길이 뜸해진 자리를 한국·중국과 중동에서 온 관광객들로 메우며 수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돈 더 내도 서비스 만족하면 OK

반휄레 교수는 파리 디즈니랜드 가격 전략이 '정해진 값'이란 뜻의 정가(定價) 시대가 저물었다는 상징으로 꼽았다. 이전 기업들은 대부분 두 가지 방법으로 가격을 정했다. 매출 목표를 정한 뒤 여기 드는 평균 비용을 계산하고 여기에 이윤을 더해 가격을 매기는 고전적 방법과 경쟁사가 정한 가격을 기준 삼아 정하는 방법. 이렇게 매긴 값은 불황이나 호황이 아니면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같은 곳에서 같은 서비스를 받으면서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건 이전 관점에서 보면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유로디즈니 전략은 성공했어요. 수십만 독일인이 디즈니랜드를 찾았고, 나중에는 영국인과 중국인도 몰렸습니다.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놀이동산, 뮤지컬 티켓을 사는 경험 중심 소비를 할 때 본인 상황에 따라 상품 가치를 현저하게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점을 깨달은 거죠. 파리에서 20유로 하는 오페라 공연을 뉴욕에서 200달러를 주고 보기도 하잖아요. 독일인들은 나중에 더 많은 돈을 낸 줄 알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업은 소비자 가치 판단을 믿고 지불 의사가 강한 소비자에게는 과감하게 가격을 더 받아도 됩니다. 이런 가격 책정 방식은 이익이 늘어나니 기업으로선 환영이죠. 놀이동산이나 공연, 스포츠 경기는 고정 비용이 높습니다. 한 명이 더 들어오면 입장료 수익은 늘어나고, 비용 부담은 줄어들기 때문에 일단 어떻게든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관건이죠."

IT 시대엔 '가변적 가격 결정'이 적합

미국 여행사 프라이스라인은 아예 가격 결정권을 소비자에게 넘겼다. 소비자가 특정 지역 호텔에 지불할 용의가 있는 금액을 인터넷상에 제시하면 해당 지역 호텔들이 경합해 최종 가격을 정하는 역경매 방식이다. 같은 방이라도 숙박률(occupancy)과 호텔 방침에 따라 가격은 수시로 변한다. 일부 소비자는 가끔 특급 호텔 객실을 여관비 수준에 얻기도 한다.

"보통 일반 소비자는 호텔 숙박비가 어떻게 책정되는지, 왜 그 값을 받는지 모릅니다. 홈페이지에 고지한 숙박비는 그저 권장 사항일 뿐이지, 그 돈을 전부 내고 묵는 손님은 얼마 되지 않죠. '얼마에 묵겠느냐'를 소비자에게 정하게 하면 정가보다 해당 호텔 가치를 먼저 따지게 됩니다. 본인이 원한 만큼 냈으니 옆방 손님보다 많은 돈을 내고 묵었어도 구매에 따른 후회가 작죠. 묵고 싶은 호텔 객실을 다른 경쟁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으면 마냥 낮은 가격을 제시해선 안 된다는 압박을 받으니까, 호텔로서도 숙박비가 바닥까지 떨어질 가능성은 드뭅니다."

반휄레 교수는 "서비스 수준이나 시설은 이미 상향 평준화했기 때문에 차별화가 쉽지 않다. 제조업도 마찬가지다. 기존 가격 정책으로는 똑똑한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가변적 가격 결정 체계'로 새로운 소비자층을 시장에 끊임없이 공급해줘야 한다. 어떤 서비스나 제품을 특정 소비자층만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다.

소비자도 만족하고 기업도 수익 늘어

새로운 소비자층이 막연한 대중 가운데 어느 한 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수시로 가격을 바꿔도' 해당 기업 서비스와 제품을 살 만큼 충성도가 높은 개인을 모두 사로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대중 가운데서 이들을 가려내려면 소득 수준, 신용카드 구매 내역, 거주지처럼 세밀한 소비자 데이터가 필수적이다. 소비자가 인터넷에서 최저가 정보를 모으듯, 빅데이터 속에서 의미 있는 소비자 정보를 끄집어 내기 위한 기업들 노력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미국 수퍼마켓 체인 크로거(Kroger)는 소비자 데이터 분석을 위해 500명 규모 전담팀을 조직한 결과, 올 3분기 온라인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 이상 늘었다. 크로거는 오프라인에서 쌓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별 온라인 소비자에게 최적화된 전자 할인 쿠폰(e-coupon)이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특가를 제공해 가격 차별화에 성공했다.

반휄레 교수는 "단 하나의 '완벽한' 가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제품이나 서비스도 소비자마다 가치를 다르게 평가할 수 있고, 심지어 이마저도 구매 시점의 주머니 사정이나 심리 상태 같은 변수에 따라 바뀔 수 있다"며 "데이터를 통해 이런 복잡성을 이해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가변적 가격 결정 체계의 핵심 역량"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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