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속 자동차 경주 대회인 포뮬러원의 경주 차량은 1000분의 1초를 다툰다. 그래서 차량 제작은 아날로그 시대에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들이 결집하는 제조 기술의 첨단이었다. 디지털 격변의 시대인 현재, 포뮬러원은 차량 제작과 레이싱에 이르는 전체 과정에 '현실-디지털-현실'을 오가며 개선이 이뤄지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방식을 채택했다. 3D 프린팅, 첨단 소재, 증강현실, 인공지능 등의 최신 기술이 각 단계마다 적용되면서 혁신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포뮬러원을 대표하는 전통의 강자 맥라렌(McLaren)팀의 디지털 혁신을 분석해 보면 디지털 격변 시대에 미래 제조업의 방향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다.

①빅데이터 분석으로 제조 기간 단축

맥라렌팀은 매년 2대의 차량을 만들어 20여 회의 포뮬러원 그랑프리에 참가한다. 참가팀들이 기존 자동차 제조 업체가 만든 차량을 개조해서 참가하는 다른 자동차 경기와 포뮬러원이 구별되는 대목이다. 1년 주기로 신차를 설계하고 완성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자동차 제조업이 본질이다. 일반적인 대형 자동차 회사가 3~5년을 주기로 진행하는 작업을 맥라렌은 매년 수행한다.

포뮬러원 그랑프리가 개막되어 신차가 경주에 나서는 3월부터 다음 해의 차량 설계가 시작된다. 경기장에서 운행되는 차량에서 산출되는 데이터를 분석하여 즉각적으로 설계에 반영한다. 매년 1만6000여 개의 부품을 재설계하는 설계팀의 컴퓨터디자인시스템(CAD)에서는 10분마다 새로운 도면이 나온다. 8월에 있는 2주간의 경기 중단 기간 동안에 데이터를 심층적으로 재점검하고 엔지니어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시험용 부품을 발주하고, 수령한 부품의 성능을 시험하면서 설계의 완성도를 높인다. 12월에는 신차의 부품 설계가 완료되고, 1월 말에는 시제품이 만들어진다. 2월에는 신차의 테스트 주행을 실시하여 문제점을 점검한다. 필요한 보완을 거치는 과정이 3월의 그랑프리 개막 직전까지 진행된다.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경주용 차량이 설계-제작-시험-완성되는 과정이 매년 반복된다.

이처럼 제조 사이클을 단축할 수 있는 이유는 완제품 출시와 동시에 개선점을 파악하고 설계에 반영하여 부품 발주와 시제품 생산이 동시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프로세스 통합이다. 또한 최종 생산품이 차량 2대에 불과하기 때문에 설계 과정에서 시험용으로 생산되는 부품들은 6개 내외의 소량이다. 우수한 품질의 부품들을 소량으로 신속하게 조달-시험-보완하기 위해 신소재, 3D 프린팅, 데이터 분석 등 첨단 기술을 적용하게 된다.

②디지털 트윈 만들어 시뮬레이션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물리적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의 정보를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해 사이버에 만든 쌍둥이다. 설계-제조-운영 등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 전체를 관리하는 접근 방식이다. 맥라렌은 경주용 차량에 대한 정교한 디지털 트윈 모델을 실행한다. 차량과 관련된 정보를 모두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하여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 전체를 관리한다.

차량에 적용되는 모든 부품과 자재는 작업 지시서에 따른 개별 부품 번호에 대응되어 관리되고 추적된다. 예컨대 납품된 금속의 경우 출하 공장, 적재 시기, 검수 결과, 부품으로 만들어진 시기 등이 즉시 추적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개별 부품들에도 RFID 칩을 삽입하여 제조 시기, 장착 시기, 사용 기간 등이 실제 운행 데이터와 연계되어 관리된다. 시스템은 어떤 부품도 유효 수명 혹은 설계 한계를 초과하여 사용되지 않도록 이동 거리, 출발한 횟수, 부품이 차량에 장착되었던 시간을 자동으로 기록하고 데이터로 관리한다. 이는 비행기 부품의 관리와 유사한 수준이다.

1만6000개 부품의 개별 위치와 수명의 추적은 그 자체로 방대한 분량의 데이터를 생성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차량의 성능은 개별 부품의 단순한 모음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최적화되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발휘된다. 맥라렌은 제조 과정에서 디지털 트윈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의 정교한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전체 성능이 극대화되는 조합을 찾아나간다. 맥라렌의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는 과거 경주의 모든 드라이버, 차량 정보, 사건사고 등 확보 가능한 모든 정보가 입력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시제품이 나오기 전에 실제 경기장의 상황을 입력하고 시뮬레이션을 시작하여 디지털 세계에서의 자료를 축적한다. 시제품이 나오면 물리 세계에서의 시험 주행을 통하여 확보된 자료를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시켜 시뮬레이션 결과와 비교하여 개선점을 찾아나가는 구조이다. 차량의 성능, 경기장별 주행 전략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연간 5만회의 시뮬레이션을 진행하고 분석한다. 시뮬레이션을 통한 최적화 과정에서 인공지능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③엔지니어의 창의적 수작업도 많아

다양한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와중에도 맥라렌팀의 프로세스들에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주도하는 수작업 요소들이 많이 존재한다. 차량에서 탄소섬유를 적용한 차체, 프런트윙, 리어윙 등의 제작은 수작업의 비중이 높은 공정이다. 물론 수작업으로 제조된 부품들도 레이저 장비를 이용해 설계대로 만들어졌는지를 검증한다. 또한 차량 성능의 최적화 과정에서 데이터 분석만으로 검증하기 어려운 사항에 대해서는 경험 많은 기술자들의 감각과 판단이 문제 해결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혁신의 많은 부분이 팀원들의 인간적인 능력과 첨단 기술을 결합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인간의 숙련된 경험과 감각은 차량의 운영과 모니터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제품의 시험 주행 동안 500여 가지의 차량 관련 데이터를 집중적으로 수집한다. 모든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주행장의 현장상황실을 경유하여 영국 오킹(Woking)에 위치한 공장으로 전달된다. 오킹 공장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주행 차량의 작동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설계에서 기대한 성능과 실제 수치와의 차이를 평가한다. 설계 기대치와 실제 수치 간의 데이터 조각들을 분석하면서 차량 전체적으로 최적의 튜닝과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려나간다.

3월에 그랑프리가 시작되면 대회 규정에 따라 차량 1대당 250가지의 센서만을 장착하도록 제한받는다. 엔지니어들은 경기장을 질주하는 차량에 장착된 한정된 채널에서 수집되는 제한된 데이터의 흐름을 바탕으로 차량의 전체 상태를 파악하고 개선 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

④타이어 교체 팀워크, 응급실서 벤치마킹

포뮬러원 경주는 평균 55바퀴의 트랙을 질주하는 동안 한 번 이상은 '피트 스톱(Pit Stop)'으로 불리는 정차 후 중간 점검을 실시한다. 과거에는 연료도 주입했으나 화재 사고가 종종 발생하면서 2010년부터 연료 주입이 금지되어 타이어나 손상된 부품을 교체하는 작업 위주로 진행된다. 0.001초를 다투는 경기의 특성상 '피트 스톱'에서의 작업은 경이적인 속도로 진행된다. 레드불팀은 1.923초 만에 타이어 4개를 교체하고 출발한 기록도 있다. 피트 크루(Pit Crew)로 불리는 15명의 작업자는 세부적 동작까지 반복된 연습으로 숙달하고 협력하여 초인적 경지에 이른 전문가들이다. 피트 크루팀의 작업 방식을 대형 병원 응급실 근무팀이 벤치마킹하여 응급 환자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료하도록 프로세스를 개선한 사례들도 있다.

맥라렌은 아날로그 시절부터 축적해 온 탁월한 전문가의 협업 구조를 디지털 시대에는 긴박한 현장과 차분한 후선으로 구분하고 상호 간 데이터를 공유하는 형태로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경기장에 위치한 현장의 전문가는 경험에 기반하여 상황 변화에 따른 대처에 집중하고, 후선의 전문가는 데이터 분석을 수행하여 현장에 판단 기준을 제공하는 협업 구조이다. 예를 들어 경기 중 가벼운 사고가 발생하여 차체에 이상이 생기면 후선팀이 주행 데이터를 신속히 분석하여 도출한 정보와 피트 스톱 현장팀의 경험을 결합하여 응급 대처를 진행한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팀 모두가 동일한 통신 시스템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