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KKLY BIZ] 漢 무제의 寬, 갖가지 재주 가진 인재를 적재적소에… 나라를 반석에 올리다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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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11.16 03:00

      이한우의 논어 제왕학 <1> 한무제의 용인술

      어릴 때부터 열린 귀널리 인재 구해…
      "욕심 많다" 직언하는 신하 급암에게 오히려 휴가 줘 달래
      귀족들 전유물이었던 승상의 자리 평민 공손홍에게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논어등반학교장
      한사군(漢四郡) 설치로 우리 역사 무대를 반도 안으로 제약한 임금이란 점에서 20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유쾌할 수 없는 중국의 황제. 그러나 한무제(漢武帝)는 제왕학 탐구에 있어 첫머리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참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의 위대성은 한마디로 "수성기에 창업 군주를 능가하는 용인술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창업 군주란 인재 등용 면에서 보면 망해가던 나라에서 내버려졌던 인재들을 찾아내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난제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영웅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우리 역사에서는 왕건이나 이성계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런데 한무제는 한나라가 안정을 찾아가던 때 제위에 올라 안주(安住)를 버리고 재도약을 위해 재위 54년을 헌신했다는 점에서 독보적 면모를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그가 자신이 처한 시대적 과제를 명확하게 꿰뚫어 보았다는 점이다. 개국 초부터 변방을 위협해온 흉노, 진나라에서 한나라로 넘어오면서 계속 흔들리던 봉건제와 군현제의 충돌, 여전히 불안정한 황제의 권력 등이 즉위 초 무제의 머리를 지배했던 난제들이었다. 그는 각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을 찾아내 적재적소에 씀으로써 이 난제들을 거의 완벽하게 해결했다. 거기에 그의 관(寬)이 있었다. 공자에 따르면 자식이 효(孝)를 다해야 하듯 윗자리에 있는 사람은 관(寬)이 있어야 한다. 관(寬)은 그냥 성품으로서의 너그러움이 아니다. 오히려 한무제는 결코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잔혹하기까지 했다.

      임금이 갖춰야 할 관(寬)은 인재를 그 그릇에 맞게 쓰는 것(器之)이고, 아랫사람이 온갖 재주를 다 갖추기를 요구하지 않고, 하나의 재주만 있어도 그것을 찾아내고 살려 맘껏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無求備於一人)이다.

      한무제의 용인술
      일러스트=정해준
      ①능력 뛰어난 평민을 승상에 발탁

      이런 의미에서 관(寬)은 어쩌면 무제가 유방을 능가했는지 모른다. 무제는 유방에게 결여됐던 학식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가들은 한무제를 평할 때 웅재대략(雄才大略), 즉 탁월한 재주와 원대한 청사진의 소유자라고 즐겨 말한다. 경제(景帝)의 아들로 장남이 아니면서도 귀 밝고 눈 밝아(聰明) 일곱 살에 태자가 됐고 열여섯 살에 경제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관(寬)의 첫걸음인 열린 귀의 소유자였다. '한무고사(漢武故事)'에는 그가 어릴 때부터 궁인이나 여러 형제들과 놀면서 "의견을 잘 모아" 모든 이의 환심을 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위하던 해(기원전 140년) 10월 현량(賢良·뛰어난 인재)을 천거하기 위해 책문을 내려 널리 인재를 구했다. 이때 동중서(董仲舒)가 오직 유술(儒術)만을 중시하고 다른 사상들을 배격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올려 무제의 눈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무제는 동중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유술을 정점에 두되 백가의 설을 두루 겸용하는 길을 택했다. 일개 평민이었던 공손홍(公孫弘)은 기원전 134년 현량으로 천거돼 어사대부와 승상에 올랐다. 귀족들 전유물이었던 승상 자리가 처음으로 평민에게도 열린 것이다. 무제는 일찍부터 인재 선발 기준을 오직 능력에만 두었다. 자연스럽게 사회 전반적으로 학술, 그중에서 유술을 공부해 관리가 되려는 풍조가 확산됐다.

      ②엄정한 법치로 정치를 보완

      더불어 무제는 법치(法治)도 병행했다. 중앙집권을 목표로 삼은 무제로서는 황실과 귀족 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엄격한 법의 존재와 집행이 필수불가결했다. 이런 무제의 구상을 구현한 인물은 장탕(張湯)이다. 이 점은 '한서(漢書)' 혹리전(酷吏傳)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장탕(張湯)은 법을 가혹하게 써서(深刻) 구경(九卿)에 올랐지만 그의 다스림에는 아직도 너그러움이 있었으며 법률은 정치를 보완할 뿐이었다."

      그러면 무제는 말단 관리 집안 출신인 장탕의 어떤 점을 보고 발탁한 것일까? '한서(漢書)' 장탕전(張湯傳)에 그 답이 있다.

      "무안후(武安侯) 전분이 승상이 되자 탕을 불러 사(史·실무 관리)로 삼았고 천자에게 추천해 시어사(侍御史)로 보임시켰다. 그로 하여금 중요한 사건을 맡겨 처리하게 했다. (위(衛)황후를 무고한) 진황후(陳皇后) 무고(巫蠱) 사건을 다루면서 끝까지 그 당여(黨與)들을 파헤쳤기 때문에 무제는 그를 유능하다고 여겨 태중대부로 승진시켰다."

      장탕 또한 눈치 보지 않고 빈틈없이 일처리 하는 능력을 보고서 뽑아 쓴 것이다. 젊어서는 글을 통해 인재를 골랐고 경험이 쌓이면서는 일을 통해 사람을 발탁했다. 오직 능력만이 사람을 골라 쓰는 잣대였다.

      ③직언하는 신하를 '친구'로 두다

      중국 제왕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신하를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 스승과 같은 신하(師臣), 벗과 같은 신하(友臣), 노비 같은 신하(隸臣)가 그것이다. 동중서는 스승과 같은 신하였고 공손홍이나 장탕은 자신이 시키는 일만 잘 처리하는 노비 같은 신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벗과 같은 신하는 누구인가? 간언하는 신하가 바로 그들이다. 직언(直言)·직간(直諫)을 하는 신하다. 지금은 아주 엉터리로 해석돼 "먼 데서 벗이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는 실은 임금에게 신하가 직언·직간할 때 진정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권고다. 여기서 원(遠)은 먼 곳이 아니라 공적인 공간을 말한다. 임금은 늘 측근 근신 후궁 환관 등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그냥 벗(友)이 아니라 임금의 신임을 얻는 동지(朋)가 저 멀리 떨어져서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와서 전해줄 때 배척하거나 싫어하지 않아야만 다음에도 바른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설마 공자가 멀리서 온 벗은 잘해주고 가까이에서 온 벗은 대충 해주라고 이런 말을 했겠는가!

      무제에게 벗과 같은 신하는 있었을까? 급암(汲黯)이 그런 신하였다. 무제는 즉위 초에 유자(儒者)들을 불러 놓고 "어짊과 의로움(仁義)을 베풀고 싶다"고 했다. 이에 암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시면서 겉으로는 어짊과 의리를 베푸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야 어찌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제는 화가 나서 낯빛까지 바뀌더니 조회를 끝내버렸다. 그럼에도 급암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급암은 병이 많았는데 무제가 여러 차례 휴가를 내려주었으나 끝내 병이 낫지 않았다. 이때 엄조(嚴助)가 급암에게 휴가를 내려줄 것을 청하자 무제가 물었다. "급암은 어떤 사람인가?" "급암에게 어떤 책임이나 자리를 맡기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 것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군주를 보필할 경우 수성(守成)해 낼 것이고 옛날의 맹분(孟賁)이나 하육(夏育) 같은 역사(力士)라도 그의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제가 말했다. "그렇다. 옛날에 사직을 지켜내는 신하(社稷之臣)들이 있었는데 급암이 바로 그에 가까울 것이다."

      엄조의 말은 실은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을 응용한 것이다.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하고, 국가의 위기 상황에 임해서는 (그 절개를) 빼앗을 수 없다면 이는 군자다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