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억원짜리 그림을 낙찰되자마자 파쇄… 그런데 가격은 더 오른다… 무슨 일이?

    • 이규현 이앤아트 대표·아트 마케터

입력 2018.10.19 03:00

[이규현의 Art Market] (10) 훼손된 작품의 가치

이규현 이앤아트 대표·아트 마케터
이규현 이앤아트 대표·아트 마케터
영국에서 가명으로 활동하는 스트리트 아티스트 뱅크시(Banksy)의 그림 '소녀와 풍선(Girl with Balloon)'이 최근 화제를 일으켰다. 지난 6일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04만파운드(약 15억4000만원)에 낙찰됐는데 작가가 미리 파쇄기를 설치, 낙찰되는 순간 작품을 파쇄했기 때문이다. 소더비는 이 전대미문 사건이 일어난 지 5일이 지나 "구매자가 이 '새로 창작된' 작품을 원래 낙찰 가격에 그대로 사기로 확정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소더비가 이 파쇄된 작품에 대해 '새로 창작됐다'고 표현한 건 뱅크시가 경매 낙찰 순간에 작품을 파쇄한 것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 즉 '행위예술'이고, 부서진 그림은 행위예술의 결과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낙찰 순간 작가가 작품 절반을 파쇄

소더비는 "이 조각난 그림에 이제 '사랑은 쓰레기통 속에(Love is in the Bin)'라는 새 제목이 붙었다"면서 "뱅크시는 작품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을 경매 현장에서 창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앞으로 가격이 더 치솟을 가능성이 높다. 경매에서 팔리는 순간 작가가 일부러 작품을 파쇄하는 전례없는 행위가 미술사에 남을 사건이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이 거래 과정에서 훼손되는 경우는 가끔 생기지만, 이번처럼 고의로, 게다가 작가 자신이 훼손한 경우는 없었다. 겉보기엔 미술 시장을 비웃는 행위 같았지만, 결과적으론 미술사에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셈이다.

뱅크시의 에이전시도 파쇄된 이 그림에 대해 뱅크시 작품으로 공인했다. 유럽에 사는 여성 컬렉터로만 알려진 작품 구매자는 "처음엔 충격을 받았지만, 미술사의 한 부분을 소유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뱅크시는 이 작품을 완전히 가루처럼 분쇄한 게 아니라, 절반 정도만 세로로 줄줄이 찢기도록 했다. 또, 경매 1주일 전 액자에 미리 파쇄기를 설치하는 장면도 영상으로 찍어 사건 이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도 했다.

뱅크시의 작품 ‘소녀와 풍선’ 훼손 전 모습(왼쪽). 훼손한 뒤 ‘사랑은 쓰레기통 속에’라는 이름으로 다시 전시했다.
뱅크시의 작품 ‘소녀와 풍선’ 훼손 전 모습(왼쪽). 훼손한 뒤 ‘사랑은 쓰레기통 속에’라는 이름으로 다시 전시했다. / 로이터 소더비
파손을 새로운 창작 활동으로 인정

'훼손'은 사실 뱅크시 작품 세계의 키워드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비싸게 팔렸던 '깨끗하게 관리하라(Keep It Spotless·187만달러)' 역시 아예 처음부터 영국의 대가 데이미언 허스트(Hirst)의 그림을 훼손하는 행위를 통해 만든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술 작품은 당연히 보존 상태가 좋을수록 시장 가치가 높다. 그런데 이 뱅크시 작품은 원본이 망가졌는데도 작품 가치가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 이는 현대미술이 기본적으로 '개념미술(Conceptual Art)'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 시장에서 컬렉터들은 작품 '결과물'보다는 작가 '아이디어(Concept)'에 돈을 내는 추세다.

마르셀 뒤샹은 1917년에 남성 소변기를 미술 전시장에 놓고 '샘(Fountain)'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작가가 새로운 오브제를 창조할 필요 없이 기성 제품이라도 창조적 아이디어만 입히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이른바 '레디 메이드 예술'의 선구적 시도였다. 아쉽게도 1917년 당시 전시한 소변기는 남아있지 않지만, 만일 있다면 그 '소변기'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을 것이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상어’.
데이미언 허스트의 ‘상어’.
데이미언 허스트의 일명 '상어(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는 실제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 안에 넣어 박제한 작품이다. 삶과 죽음의 주제를 엽기적으로 다루는 작가가 1991년 만든 기념비적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상어가 부패하고 용액이 흐려져서 이후 상어 교체 작업을 거쳤다. 하지만 이 역시 작가의 개념이 중요하므로, 작가나 소장자는 작품 원본이 훼손됐다고 보지 않고 있다.

피카소의 ‘꿈’.
피카소의 ‘꿈’.
훼손·복원 과정에서 작품가 오르기도

개념미술이 아닌데도 이례적으로 훼손과 복원 과정이 큰 이슈가 되어 가격이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작년에 4억5030만달러에 낙찰돼 세계 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를 찍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구세주(Salvator Mundi)'는 심한 훼손으로 그림을 알아보기 힘든 정도였는데 6년 동안 복원을 거치고 논란을 겪으면서 더 유명해졌다.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 '꿈(The Dream)'도 훼손된 경력에도 기록적으로 팔린 경우다. 이 그림은 라스베이거스 윈 리조트의 스티브 윈 회장이 가지고 있다가 2006년 1억3900만달러에 팔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거래를 앞두고 윈 회장이 지인들에게 그림을 자랑하다가 팔꿈치로 그림을 쳐서 지름 15㎝에 달하는 큰 구멍이 났다. 그 당시엔 거래가 취소됐지만, 이후 복원을 하고 윈과 보험 회사 간 소송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은 더 유명해졌다. 7년 뒤인 2013년 원래 사려고 했던 스티븐 코언에게 처음 금액보다 더 비싼 1억5500만달러(약 1626억원)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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