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 내려놓고 소비자 곁으로… '가전 王'의 귀환

입력 2018.09.01 03:00

[저성장 돌파한 일본 기업] (11) 파나소닉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동북아 연구실장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동북아 연구실장
'가전 왕' 파나소닉이 돌아왔다. 안으로는 버블 붕괴, 고령화·저출산 현상 심화 등으로 내수시장이 침체되는 가운데 밖으로는 한국의 삼성·LG는 물론 중국 하이얼 등 후발 주자에 밀려 위기에 빠진 지 대략 7년 만이다. 파나소닉의 부활은 경쟁자였던 소니가 엔터테인먼트, 금융 등 IT 이외 업종으로 다각화하면서 실적 회복에 안간힘을 쓴 반면 여전히 IT와 관련 부문을 주력 산업으로 이뤄졌다. 올해 창업 100주년을 맞이한 파나소닉의 경영실적 회복 비결은 뭘까.

잘못된 개혁이 위기 불러

1990년대 후반 퍼스트 무버(first mover)에 의한 승자 독식 현상이 IT 업계를 필두로 확산되고 있을 때 파나소닉은 여전히 '경영의 신'이라 칭송받는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의 '수도철학(水道哲學)'이란 비즈니스 모델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도철학이란 대량생산·대량소비를 전제로 수돗물처럼 싼 제품을 대량생산·판매함으로써 고성장하는 것이다. 파나소닉을 가전의 왕좌에 올려놓은 원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경제 버블 붕괴로 수도철학이 작동하지 않고, 1989년에는 창업자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창업자 일족이 아닌 나카무라 구니오(中村邦夫)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개혁이 시작됐다. 개발·생산·영업을 각 사업부가 각자 책임지는 사업부제에서 본사 중앙관리체제로 전환하고, 종신고용이란 관행을 깨면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또 PDP(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 TV 사업을 주력 사업으로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인력 구조조정 여파로 1만3000명이 희망 퇴직하면서 삼성·LG 등 후발 경쟁사로 전직, 파나소닉과 후발 경쟁사 기술력 차이가 급감했다. 가전·반도체 등 IT 관련 완제품은 물론 부품과 소재에 이르기까지 전방위 경쟁이 심화됐다. 파나소닉은 특히 PDP TV를 중심으로 한 대형 패널TV 부문에서 경쟁력을 자랑했으나, 경쟁사에 재취업한 전직 기술자들이 개발한 대형 액정 TV에 밀려 수익력이 악화됐다. 대규모 기술인력 구조조정과 회사 명운을 건 1조엔 규모 대규모 투자가 10여 년 만인 2012년 7722억엔 손실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TV·냉장고·세탁기와 같은 백색가전 중에서도 꽃은 TV다. 파나소닉 입장에서는 타 경쟁사들이 PDP 사업 부문에서 발을 빼고 있었음에도 PDP 부문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파나소닉 창업 100주년을 맞아 파나소닉이 생산하는 가전제품을 다 모아 직원들이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2 창업을 다짐하는 자리다.
파나소닉 창업 100주년을 맞아 파나소닉이 생산하는 가전제품을 다 모아 직원들이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2 창업을 다짐하는 자리다. / 파나소닉
성공 신화를 버리다

PDP 실적 부진이 파나소닉 전체를 위기로 몰고 가는 상황에서 2012년 6월 취임한 쓰가 가즈히로(津賀一宏) 사장은 과감히 PDP TV 사업을 접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그동안 발목을 잡고 있던 '수도철학'에 근거한 성공 신화는 막을 내렸지만, 수익성은 개선되었다. 2012년 437억엔에 불과했던 영업이익이 2015년 3819억엔으로 3년 연속 상승했다. 이후 회계기준 변경에도 불구하고 영업이익은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당시 똑같이 TV 부문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일본 가전 3대 제조업체 중 하나인 샤프와 소니가 영업이익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이후에도 실적 회복에 애를 먹은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의 가전에 희망이 없다는 건 사실이다. 한국·중국 기업과 가격경쟁을 해 봤자 의미 없다.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이다"는 쓰가 사장의 '버리는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파나소닉은 쓰가 사장 취임 이듬해인 2013년 3월 기준으로 볼 때 전체 매출의 약 15%, 영업이익의 약 9%를 가전 부문이 속한 사업부에 의존했기 때문에 가전 부문 회생 없이 파나소닉 회생은 불가능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추진된 게 제이 콘셉트(J-Concept) 상품 개발을 위한 제이 프로젝트(J-Project)였다.

공창형(Co-Creation) R&D

제이콘셉트 가전은 50~60대를 주 고객으로 한 프리미엄 가전.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된 일본에서 파나소닉이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특히 50~60대는 삶의 경험이 풍부해 상품 구매행태가 까다로운 층. 어중간한 상품으로는 실패하기 쉽다. 당시 PDP 사업 실패라는 위기에서 이 프로젝트 성공이 절실했다. 이를 위해 파나소닉은 사업 부문 간 장벽을 허물어 R&D 역량을 집결시키고, 전직 사우까지 참가시켜 50~60대 니즈를 상품 개발에 반영하도록 했다. 또 가전 전문잡지 편집자와 평론가를 활용, 철저히 소비자 입장을 반영하는 이른바 공창형(Co-Creation) R&D를 추진했다.

일본 내 어떤 기업들도 해 본 적이 없는 3만명에 달하는 광범위한 시장조사도 벌였다. 가전 이용 행태는 물론 가치관까지 분석하여 제품 개발에 반영했다. 그 결과, 세계 최경량 청소기, 65~74세 여성 평균 신장에 맞춰 허리 부담을 줄여주는 세탁기, 고령자 눈 건강을 고려한 조명기구, 무게와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여 고령자가 운전하기 쉬운 전동자전거 등 히트 상품이 탄생했다. 2000년대 초반 10%대까지 하락했던 파나소닉 일본 가전시장 점유율은 2017년 3월 27.5%까지 상승했다.

B2B로 신성장동력 확보

파나소닉은 가전의 왕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자동차용 내비게이션 시스템이나 오디오, 리튬이온전지 등 차량용 IT 기기·부품은 물론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나 건축 내·외장재 등 주택 관련 제품, 항공기용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및 통신 서비스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각화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자동차 관련 기기·부품과 주택 관련 제품들은 B2B 특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이 부문은 B2C와 달리 가격 변동이 심하지 않아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도 하다. 또 자동차의 급속한 전장화, IT 활용도가 높은 스마트시티 확산 등 같은 산업 환경 변화는 파나소닉이 가진 IT 제조 및 서비스 역량을 활용해 얼마든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쓰가 사장 취임 후 자동차 관련 기기 및 부품과 주택 관련 부문을 성장 부문으로 정하고 육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18년 현재 자동차 관련 사업 부문과 주택 관련 사업 부문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각각 35.1%, 20.3%, 영업이익 비중은 각각 24.0%, 19.1%로 파나소닉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독자주의 탈피…외부 협력 강화

B2B 사업 특성상 모든 개발을 사내에서 해결하는 방식은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파나소닉 B2B 사업 부문이 새로운 성장 부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독자주의를 버리고 외부 고객과 연계를 강화한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 사업 부문은 테슬라에 대한 300억엔 출자 외에 총 5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네바다주에 전기자동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공장인 기가팩토리를 건설 중이다. 현재 이 부문 세계 1위(2016년 시장점유율 16.5%)를 굳히면서 안정적인 매출과 수익이 예상된다. 최근에는 도요타자동차와 손잡고 전기 자동차, 하이브리드 자동차 등에 이용되는 리튬이온전지를 공동 개발하고 있다. 주택 분야에서도'후지사와 지속가능 스마트타운' 건설 사업에 대표간사를 맡으면서 사업에 참여하는 19개 회원사와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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