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내리자" 손은 잡았지만… 동상삼몽(同床三夢)

입력 2018.08.18 03:00

선거 앞둔 트럼프 증산 요청에
사우디 살만 국왕은 이란 견제 위해
러시아 푸틴은 中·서유럽 견제위해
삼각동맹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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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살만(가운데) 사우디 국왕,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각기 다른 정치적 이유로 손을 잡고 유가 하락 정책을 펼치고 있다. /블룸버그
지난 6월 30일 트럼프 미 대통령은 살만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에게 전화를 걸어 원유 증산 규모를 200만배럴로 늘려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이 사우디에 석유 증산을 요청한 건 드문 일. 살만 국왕은 이에 흔쾌히 응했고, 이후 올 6월까지 연초 대비 23% 오르며 고공 행진하던 국제 유가(油價)는 하락세로 전환했다. 7월에도 한 달간 6% 떨어진 데 이어 8월 들어서도 지지부진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사우디·러시아 등 3국은 세계 원유 생산량에서 줄곧 1~3위를 나눠 가졌던 나라다. 특히 사우디와 러시아는 국가 경제가 석유 수출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산유량을 줄여 국제 유가를 끌어올리는 정책을 펴왔다. 하지만 국내 유가를 낮춰 물가를 잡으려는 트럼프의 요청에 증산으로 돌아섰다. 나름대로 정치적 노림수가 있기 때문이다. 3국 정상들은 각각 어떤 속셈으로 손을 잡았을까.

트럼프, 중간선거 앞두고 물가 낮추기

올해 임기 2년 차를 맞은 트럼프는 그동안 여러 차례 유가 상승에 불만을 드러낸 바 있다. 그 이면엔 올 11월 상·하원 중간선거가 깔려 있다. 트럼프 핵심 지지층은 백인 저소득층으로 트럭 운전사를 비롯해 기름값에 민감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국제 유가는 산유국 증산 합의에도 상반기 내내 떨어질 기미가 안보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비회원국 10개국이 6월 22일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하루 100만배럴씩 증산하기로 합의했지만, 일주일 뒤인 29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8월 인도분은 배럴당 74.15달러로 장을 마감, 3년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 휘발유 평균 가격은 갤런당 2.85달러로 작년(2.23달러)보다 28% 상승하면서 서민들 불만이 커진 상황이다. 그러자 조급해진 트럼프가 사우디에 SOS를 친 것이다. 사우디 국영 SPA통신은 "두 정상이 석유 시장 안정을 위해 산유국들이 잠재적인 공급 부족을 해결해야 한다고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살만, 美·이스라엘과 전략 벨트 염두

원유 수출 대국인 사우디가 미국에 동조하는 이유는 아랍의 패권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시아파 종주국 이란 강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최근 중동에서는 6년간 시리아 내전에서 승리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장기 집권에 성공하면서, 알아사드를 지원한 이란과 러시아 영향력이 강화됐다. 또 이란이 지원하는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부상하는 등 시아파의 입지가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이 지원한 쿠르드 자치정부의 독립이 좌절되면서 서방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이는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엔 악몽이다. 사우디 남쪽 지역인 예멘에서는 이미 수니파·시아파 갈등 대리전이 진행 중이다. 사우디는 예멘의 시아파 장악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과 협력 가능성마저 밝혀왔다. 이스라엘로서도 이란의 부상은 큰 위협이 된다. 즉, 미국-사우디-이스라엘을 연결하는 전략 벨트의 구축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푸틴, 극동진출때 美도움 희망

지난해 기준 세계 최대(하루 1100만배럴 생산) 산유국인 러시아도 사우디와 함께 기름 증산에 합의했다. 러시아는 심지어 일평균 150만배럴 증산을 주장할 정도로, 유가 잡기에 적극적이다. 트럼프는 이에 화답하듯 지난달 16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미·러 정상회담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옹호하기도 했다.

트럼프와 푸틴이 뜻을 함께하는 배경에는 '중국 견제'라는 이해관계가 섞여 있다. 미국은 러시아가 중국과 지정학적으로 매우 밀접하면서도 경제 규모 자체가 미국에 위협적이지 않아 유용한 동맹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서유럽을 견제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미국은 이란 핵 협정 탈퇴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방위비 분담 등으로 서유럽 국가들과 마찰이 커지고 있는데, 러시아와 협력하면 서유럽 국가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북한 비핵화에 대해서도 미국과 러시아는 발을 맞출 수 있다. 트럼프는 비핵화를 정치적 과업으로 삼고 있고, 핵보유국인 러시아로선 주변국들이 핵을 보유하면 안보 정세가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는 처지다. 아울러 푸틴은 '신동방정책'을 핵심 경제 개발 프로젝트로 내걸면서 북한 진출을 노리고 있는데, 이를 위해선 미·북 협상이 원만한 결과를 내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되는 게 필요하다.

트럼프 이란 제재가 향후 유가 변수

이런 삼각 동맹에도, 유가가 다시 상승세로 반전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가 막상 이란산 원유 금수 조치를 내리면서 정책적 자가당착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8월 6일 서명한 대이란 제재 행정명령에는 11월부터 이란의 원유 제품 거래를 제재 대상으로 넣었다. 이란은 세계 5위 원유 수출국이다.

후탄 야자리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릴린치 수석연구원은 "이란산 원유 공급이 줄면 시장에 공급 부족 사태가 올 수 있다"며 "내년 2분기 국제 유가는 90달러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럼프 압박에 이란이 강경 대응하는 점도 유가 상승을 자극하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어떤 원유 선적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국을 위협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20%가 지나는 길목이다. 만약 이란이 해군을 동원해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운항을 통제한다면 국제 유가가 급등하는 것은 물론이고 군사적 충돌까지 부를 수 있다. 이런 지정학적 상황에서 미국·유럽·동북아의 석유 수요가 점차 늘어나면서 연말에는 WTI가 배럴당 최고 105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미 원자재 투자 기업 어게인캐피털이 전망했다. 이에 반해 산업 분석 업체 우드 매켄지의 수산트 굽타 수석연구원은 "산유국의 하반기 증산과 더불어 석유 수요가 약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내년 국제 유가는 배럴당 75달러 선에 머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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