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Venice… 개펄에서 지중해의 여왕으로… 교역으로 이룬 '해상제국 1000년'

    •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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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07.14 03:00

      인구 17만명… 無에서 有를 창조한 혁신도시 베네치아

      게르만족 남하하자 피해 숨어든 개펄… '가진 게 없어서' 무역으로 생필품 조달
      종신제 국가원수를 국회 선출·시민 승인, 권력 남용 막아
      국가가 정기船 운영 무역 진흥에 앞장서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베네치아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나라다. 개펄밖에 없던 바닷가에서 출발, 지중해를 주름잡았다. 소금과 물고기로 시작, 최고급 향신료와 귀중품 교역을 주도했다. 공화국 정치체제를 120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당대 문물 중심지로서 상거래 법률과 제도 등에서 근대 혁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최대 인구는 17만명에 불과했으나 서유럽을 대표하는 해상세력이었다.

      지반 약해 건물 세우기도 어려워

      베네치아에는 '가진 게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걸 찾는다'는 차별화 전략이 있었다. 침략자를 피해 숨어든 피란지 개펄은 척박했다. 땅이 없으니 농사는 불가능했고, 지반이 약해 건물을 세우기도 어려웠다. 식량과 연료 등 생필품은 물론 지반을 다지기 위한 목재·석재 등 모든 물품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했다. 결국 활로는 교역이었다. 베네치아는 '독립과 자유'에 기반한 '안전한 무역로 확보와 유지'를 국가 전략으로 굳게 세우고 주변 정세에 따라 역량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무역국가 특성상 영토의 확대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중간 거점 확보는 필수였다. 베네치아에서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이탈리아 동부 해안과 동지중해에 상선 기항과 항로 안전을 위한 거점 확보와 유지가 최우선 정책이었다. 지중해에 흩어진 거점을 중심으로 성립된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외교관을 활용한 정보망을 구축했다. 상대국에 외교관을 상주시키는 전통은 베네치아에서 비롯됐다. 평시에는 상대방과 교섭, 회유, 외교를 진행하고, 경우에 따라 전쟁을 감수하면서 무역로를 지키고 제해권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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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리알토 다리의 과거와 현재. 1591년 완성됐다. 베네치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대운하(Grand Canal) 중심에 건설됐다. 왼쪽은 18세기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과르디가 그린 리알토 다리 모습. 오른쪽은 현재 풍경이다. /프랑스 국립박물관 연합·조선일보 DB
      교황 개입 견제하며 공동체 합의 중시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양 중세는 교회가 신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시대였다. 로마 교황은 이탈리아 반도 중부(교황령)를 지배하는 세속군주이면서 서유럽 기독교 세계 수장으로서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다. 각국의 군주·영주를 승인하고 대관식을 주관하는 방식으로 정통성을 부여했다. 자신이 임명한 교구 주교들을 통해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던 베네치아도 로마 교황이 주도하는 종교적 질서에 포함됐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종교적 명분은 최대한 활용하고 종교적 개입은 최소화하는 정교분리 정책을 고수했다.

      수호성인 성 마르코(마가)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를 궁전, 건물, 선박, 깃발, 동전 등에 새겨넣고, 도심에 성 마르코 유해를 안치한 대성당을 지어 종교적 위상을 과시했다. 하지만 대성당은 교황이 파견한 주교 관할이 아니라 국가원수 개인 예배당으로 시민이 운영했고 헌금도 재단의 수입이었다.

      국가원수 대관식도 교황 대리인이 아니라 시민 대표가 주관, 권위의 원천이 종교가 아니라 공동체 합의임을 명확히 했다. 주교나 추기경 등 고위성직자를 배출한 가문 출신은 정부 고위직에 취임하지 못했다. 로마 교황이 임명한 주교는 조선소가 모여 있는 외곽 지역에 거주했고, 성직자도 신자들이 선출하면 교황청이 승인하는 방식으로 로마 교회 영향력을 최소화했다. 종교재판소는 있었으나 재판관은 성직자가 아닌 시민이라 유럽을 휩쓸던 마녀재판 사례도 없었다. 십자군 전쟁에도 참여했으나 명분과는 별개로 철저히 국가이익 차원에서 접근했다. 종교에서 독립된 언론자유 분위기에서 다양한 서적들이 출판되고 각양각색 지식인들이 모여들면서 문물의 중심이 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정치 전담 명예직 국회의원 1000명

      베네치아 정치체제는 귀족정과 합의제가 1000년 이상 조합되어 유지됐다. 세습군주가 없는 공화국인 베네치아는 종신직 국가원수를 697년부터 1797년까지 선출했다. 종신직이기에 시민 인기를 의식하지 않아도 무방한 장점이 있으나, 임기가 없기 때문에 전횡을 방지하지 못하면 혼란에 빠질 위험이 상존했다. 베네치아는 귀족만이 정치에 참여하게 하는 과두정 형태에 합의제를 혼합하여 견제와 균형을 유지했다. 국가원수를 시민집회에서 선출하던 방식은 1172년부터 국회에서 선출하고 시민집회에서 승인하도록 변경됐다. 일부 원수가 대중과 결탁하여 지위를 세습하려는 사례가 발생하자 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나아가 원수는 선출된 임기제 보좌관 6명과 협의를 거쳐 의사결정을 하도록 법제화하여 전횡을 차단했다. 1332년에는 공화국 국회의원을 종신직에 세습제로 법제화하여 귀족정 공화국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당시 국회의원 1000여 명이 정치를 전담하게 됐다. 서유럽 다른 지역의 귀족들은 영지를 소유한 특권계급이었으나, 토지가 없이 무역이 주업인 베네치아 귀족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명예 이외의 특권은 없었다.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시민 에너지를 행정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귀족은 국회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임기 1년 내외 정무직을 맡았고, 시민들로 전문관료 조직을 구성했다. 종신고용을 보장받은 시민 출신 공무원들은 정보를 수집하고 정책을 입안하여 국회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보좌하고 실행을 담당했다. 귀족들의 정무직은 바뀌어도 시민들의 행정직은 붙박이라서 정책 결정과 전문지식이 결합되는 시스템이 확립됐다.

      영토가 넓은 국가는 정치적 혼란이 있어도 견뎌낼 수 있지만, 기반이 빈약한 베네치아는 한 번의 시행착오로도 패망할 수 있는 취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귀족정에 기반한 합의제와 시민의 전문관료 체제를 결합시켜 세습군주가 되려는 유력자의 야심과 군중의 광기가 만나서 분출되는 정치적 혼란의 위험성을 최소화했다. 1200년 동안 반정부 운동은 2번에 불과했고, 1건은 현직 국가원수가 연루되기까지 했지만 모두 지엽적 에피소드로 마무리됐다.

      베네치아는 국가 차원에서 공급하는 공공 인프라에 민간의 활력을 접목하는 방식으로 번영을 이루었다. 1255년 국가가 주도하여 창설된 정기무역 항로인 '무다'가 대표적 사례이다. 국가가 개설한 정기 항로라는 인프라에 민간이 참여하는 상호이익 구조였다. 국가가 개설한 정기 항로 이외의 항로 개설은 민간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겼다.

      가난한 젊은이도 선원으로 출세 기회

      처음에는 제노바의 해적 행위에 대처하는 호위선단 항해 방식의 안전 대책으로 시작됐다. 이후 점차 비잔틴, 시리아, 이집트, 흑해 지역 등 주요 교역지를 왕복하는 정기 항로로 발전했다. 국가는 선박을 투입하고 선단장을 임명하여 운항 조건을 확보했다. 운임만 지급하면 누구나 국유선으로 화물을 운송하게 되어 무역에 참여하는 저변이 확대됐다.

      먼저 중소상인의 사업 기회가 많아졌다. 이전에는 선박을 소유한 거대 상인들만 무역이 가능했으나 자금력이 취약한 중소상인들도 무역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일반 시민들도 소액을 무역에 투자할 기회가 생겨났으며 심지어 하급 선원들에게도 자신에게 할당된 화물을 실을 권리가 주어졌다. 가난한 젊은이가 선원으로 취업하여 돈을 벌면서 할당받은 분량의 화물을 거래하여 추가 수익을 거두는 기회를 가졌다. 베네치아 정기 항로의 정착은 여객선 사업도 탄생시켰다.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일종의 지중해 관광업이 태동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