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맥아 50%만 넣어도 돼"… 일본 맥주, 110년 만에 확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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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07.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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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김현국
      해가 진 후에도 기온이 30도를 웃돌고 공기 중엔 습기가 가득한 7월의 일본 도쿄. 번화가인 긴자(銀座) 지역에 자리한 한 편의점에 들어서니 퇴근길에 들른 듯 양복 차림인 남자 손님이 맥주 진열장 앞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진열장 안에 홍보 스티커가 붙은 신제품 맥주들이 늘어서 있다. 한 여자 손님이 신제품 맥주들을 훑어보더니, 일본 주류업체 산토리가 기간 한정으로 판매하는 라거 캔을 하나 집어들었다. 손님들이 빠져나가자 편의점 직원이 분주하게 맥주 코너의 빈자리를 채워넣었다.

      일본 맥주 기업들이 신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젊은 층과 여성 소비자의 기호에 맞춰 오렌지, 레몬 같은 다양한 과일 맛을 첨가한 신제품들이다. 일본 정부가 정체된 맥주 시장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관련 법을 개정하며 지원에 나선 덕분이다. 일본 정부는 올해 4월 110년 만에 처음으로 맥주 제품에 대한 원료 규제를 완화하고, 주세 개정 방침도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우선 '맥주의 정의'를 변경해 핵심 원료인 맥아 비율이 '67% 이상'일 때만 맥주로 인정하던 데서 기준치를 '50% 이상'으로 대폭 낮추고, 첨가해도 맥주로 인정하는 부원료의 범위를 확대했다. 까다로운 기준과 규제 때문에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기 어렵다는 맥주업계의 불만이 반영된 결과다. 맥주 제품에 대한 세(稅) 부담도 점진적으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현행법상 맥주에 부과되는 세금은 350mL 한 캔당 77엔인 반면, 일본주·와인·주하이(소주에 탄산과 과즙을 넣은 일본의 알코올 음료) 등 비(非)맥주 제품에 붙는 세금은 28~49엔으로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일본 정부는 오는 2020년부터 맥주에 대한 세금은 줄이고 기타 주류에 대한 세금을 조정해, 제품 간 세액 격차를 좁혀나갈 계획이다.

      아사히 '수퍼 드라이' 판매 29년만에 1억 상자 아래로

      맥주업계는 이번 정부의 법 개정을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한층 세분화되고 까다로워지면서, 기존 맥주만으로는 입지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탓이 크다. 일본 맥주업계 1위인 아사히는 지난해 간판 상품인 라거 맥주 '수퍼 드라이'의 판매량이 29년 만에 처음으로 1억 상자를 넘기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소비자들의 변화에도 일본 맥주업체들은 엄격한 원료 규정 때문에 다양한 신제품을 출시하기 어려웠다.

      일본 맥주업체들은 최근 레몬·오렌지 같은 친숙한 과일부터 레몬그래스(레몬향 허브)·블랙커런트 등 이국적인 재료를 첨가한 신제품 맥주를 공격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일본 맥주업계 '빅 4(아사히·기린·삿포로·산토리)' 전체가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 맥주 시장 점유율 1위인 아사히맥주의 히라노 신이치 (平野伸一) 사장은 지난 4월 신제품 발표회 자리에서 "올해를 맥주 시장의 개혁 원년으로 삼고, 정체된 맥주 시장을 확대하겠다"며 레몬그래스를 첨가한 맥주 등 신제품을 선보였다. 아사히맥주 신상품 개발 부서의 오카무라 도모아키(岡村知明) 과장은 "일반적인 맥주는 미지근해지면 알코올과 보리 특유의 냄새가 진해지면서 (본연의) 맛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며 "우리 회사는 연구를 통해 레몬그래스가 보리 냄새를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맥주의 부원료로 레몬그래스가 허용되지 않아 그동안 제품에 사용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기린은 소비자 설문조사를 토대로 젊은 층이 맥주를 멀리하는 이유 중 하나가 맥주의 독특한 쓴맛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포착하고, 상큼한 맛을 강화한 맥주로 제품 개발 방향을 잡았다. '그랜드 기린' 맥주 시리즈에 레몬맛 제품을 추가하고, 오렌지 껍질과 고수풀 씨를 사용한 신제품 '벨지언 화이트'를 지난달 출시했다. 다야마 도모히로(田山智廣) 기린 홍보부장은 "그동안은 신상품의 이름과 디자인이 달라도 맛은 기존 맥주와 큰 차이가 없었다"며 "부원료 폭이 넓어지면 다양한 (맛으로) 차별화할 수 있어 소비자들의 이목을 끄는 좋은 홍보 요소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일본 맥주업계 3위인 산토리는 '바다 건너 맥주 레시피'라는 제품군을 추가해 '오렌지 상쾌한 맥주'와 '향기로운 카시스 부드러운 맥주'를 선보였다. 산토리 브랜드전략부의 오쿠다 히데오(奧田秀朗) 과장은 "그동안 일본 주류업계에서 발포주란 맥주맛 음료 완성품에 다른 맛을 섞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법 개정으로) 아예 맥주를 만드는 발효 단계에서부터 부원료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며 "완전히 새로운 맥주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고 법 개정의 의미를 설명했다. 삿포로맥주도 자몽과 오렌지 껍질로 맥주의 쓴맛을 대체한 신제품 '비어 첼로'를 출시했다.


      세율 낮은 발포주 대신 새 맥주 생산 늘어날듯


      맛보다 가격 경쟁에 무게를 둔 주류업체들의 경쟁 양상도 달라질 전망이다. 일본 주류시장은 오랜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맥주보다 세율이 낮은 발포주(일본에서 맥아 비율이 낮은 맥주를 통칭), '제3의 맥주(옥수수·콩 등 기타 곡물을 원료로 한 유사 맥주)', 추하이 등을 중심으로 값싼 신제품 개발에 집중해왔다. 그러나 주세법 개정으로 오는 2020년부터 맥주의 세율이 인하되고, 2026년부터 맥주와 발포주, 제3의 맥주에 부과하는 세금이 동일해진다. 맥주업체들이 가격 차별화에서 제품 차별화로 전략을 수정해야 하는 이유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 주류업체들도 개성 있는 맛과 향을 첨가한 신상품을 내놓고 있다. 나가노(長野)에 기반을 둔 얏호브루잉은 가쓰오부시(가다랑어포)를 첨가한 맥주를 내놓았다. 얏호브루잉은 가쓰오부시의 감칠맛을 내는 성분이 맥주 원료의 발효를 촉진하고 홉의 향을 강화한다고 설명했다. 얏호브루잉은 유자, 참깨, 흑당 등 이색적인 재료를 사용한 맥주 제품을 개발해 온 중소 맥주업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