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잘 만들었으니 팔리겠지? 기업들 덫에 걸렸다"

입력 2018.07.14 03:00

바라트 아난드 하버드大 경영대학원 교수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HBS) 바라트 아난드(Anand) 교수가 디지털 경영 전략을 가르치려 매사추세츠주(州) 보스턴 강의실에 들어섰다. 오전 7시 30분에 시작하는 이른 아침 수업인데도 이미 교실엔 정원을 넘긴 100여명 학생이 대기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모인 곳은 교실이 아닌, 강의실 앞 벽을 꽉 채운 모니터 속이다.

바라트 아난드 하버드大 경영대학원 교수

이날 이벤트는 HBS가 2015년 초(시범 서비스는 2014년) 선보인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 HBX(HBS의 디지털 버전이라는 뜻)가 올해 처음 시도한 최신 실험이었다. 호주, 인도, 러시아 등 전 세계 시간대를 어우르는 44개 나라 학생 168명이 오로지 원격으로만 실시된 실시간 수업에 참여했다. 음성과 문자를 통해 교수와 학생, 혹은 학생과 학생 문답이 수시로 오갔고 때로는 토론으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수업은 7개 강의를 거치며 오후 3시까지 이어졌다.

하버드대 연구실에서 지난달 만난 아난드 교수는 "디지털 경영의 핵심 키워드인 '사용자 간 연결'을 교육에 접목한 결과물이 HBX"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 그의 책 '콘텐츠의 미래(The Content Trap)'를 관통하는 뼈대 역시 '연결'이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아난드 교수는 1997년부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보화 시대 기업 전략의 전문가로 통하며 HBS 문영미 교수 등과 함께 HBX 설립을 주도했다.

좋은 콘텐츠만으로는 부족하다

학생 사이의 네트워크 구축에 초점을 맞춘 HBX는 교수의 강의 동영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기존의 개방형 무료 온라인 교육과는 정반대 길을 택했다. 2015년 출범 당시에 수강료는 무료가 아닌, 1500달러로 책정했다. 전체 11과목 중 기초 3과목을 동시에 수강하는 기준이다. 이 수강료는 현재 1950달러로 올랐다. 개방형이라는 특성도 버리고 자기소개서 등을 통한 학생 선발 절차를 도입했다. 기말고사는 도시별로 정해진 장소에 찾아가서 봐야 할 정도로 수업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폐쇄적이고 비싸다는 일부 지적에도 HBX는 지난 3년 동안 108국 약 3만명이 수강하며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 2월엔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 직원 6000명이 이 HBX 리더십 수업을 단체로 들어 화제가 됐다. 아난드 교수는 "'콘텐츠엔 노력의 3%만, 대신 학생 사이를 연결한 소셜 러닝(사회적 학습)에 97% 집중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HBX를 준비했다"고 했다.

―연결이 아니라, '하버드대 강의'라는 훌륭한 콘텐츠 자체가 흥행 요소 아닌가.

"대학 시장에선 하버드가 지닌 강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하버드의 경쟁자는 다른 대학이 아닌, 구글이다. 구글로 아무 경영 이론이나 사례를 검색해 보라. 굉장히 정확하고 방대한 정보가 바로 쏟아진다. 이런 세상에서 콘텐츠만으로 사람을 끌겠다는 발상은 무모하다. 우리는 지식 자체보다는 그 지식을 하버드적인 방식으로 흡수하도록 한, 잘 짜인 경험(curated experience)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콘텐츠만으론 부족했다."

―이제 콘텐츠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콘텐츠는 여전히 중요하다. 문제는 '좋은 콘텐츠를 만들었으니 잘 팔리겠지'라고 여기는 맹신(盲信) 탓에 콘텐츠의 덫에 빠지는 것이다. 좋은 콘텐츠는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닌 기초일 뿐이다."

고객(사용자)을 연결하라

―사용자 간 연결이 꼭 필요한가. 예컨대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마케팅으로 널리 알리면 되지 않나.

"마케팅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디지털 시대엔 그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최대한 많은 이에게 정보를 일단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쳐도 소비자는 곧 흥미를 잃고 떠나기 십상이다. 쉴 새 없이 새 정보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소비자를 '내 편'으로 잡으려면 더 확실한 '당근'이 필요하다. 사용자 커뮤니티에서 이뤄지는 흥미진진한 네트워크는 소비자를 묶어둘 강력한 유인이다."

아난드 교수는 사용자 연결을 통해 성공을 이룬 기업의 사례로 노르웨이 일간지 VG를 들었다. 독자들로부터 때때로 인터넷 사진·사연 제보를 받아온 VG는 화산재가 유럽을 뒤덮은 2009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때 새로운 실험을 했다. 항공편이 모조리 취소돼 교통편을 구하려는 대란(大亂)이 발생하자 VG는 순발력 있게 독자 사이에 차량편 연결(카풀) 앱을 만들어 공개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이 앱의 도움을 받아 이동했는데 이들은 모두 VG의 충성 독자 겸 취재원으로 남았다. 재난 중 이동에 관한 생생한 사연을 활용한 좋은 기사들도 나왔다.

―카풀 앱은 언론사 주력 상품인 '기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VG의 실험은 혁신적이었다고 본다. 콘텐츠의 덫을 피하면서 사용자 연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연결은 때로 핵심 콘텐츠와 멀어 보이는 영역에서 발생한다. VG는 이후에도 독자들이 직접 정보를 쓰고 수정하는 '독감 예방접종 대기 시간 지도' 등 사용자 참여를 유도할 도구를 지속적으로 내놓았고 노르웨이 1위 온라인 매체로 올라섰다."

―사용자 연결을 교육에 접목한 결과가 HBX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기존 디지털 교육엔 무슨 문제가 있었나.

"기존의 온라인 교육은 가입 절차가 간단한 무료 서비스가 대부분이다. 좋은 강의를 불특정 다수가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개방성은 돋보였지만 심각한 단점이 있었다. 한두 번 듣다가 마는 이가 너무 많았다. 수업 완수율은 10%(HBX는 85%)도 안 됐다. 이들은 교수가 설명하는 동영상을 학생이 보고 듣는 브로드캐스팅(broadcasting), 달리 말하면 '중심부에서 바큇살로(hub to spokes)' 방식을 대부분 택했다."

고객 간 상호 경험이 중요하다

―HBX는 그럼 어떻게 사용자(수강생) 연결을 끌어냈나.

"우리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브로드캐스팅 방식 대신 수강을 결심한 학생들 사이를 연결하는 '바큇살끼리(spoke to spoke)'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수강자는 반드시 실명을 쓰고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 게시판 토론 참여·기여도를 성적에 반영한다. 개별 수강생에게 수시로 뜨는 팝업 질문(1분 안에 답해야 한다)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다른 학생도 볼 수 있게 한다. 비슷한 지역에 산다면 오프라인 스터디 모임을 장려한다….' 이런 식의 원칙들을 세세하게 세워 적용해 나갔다. 물론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고, 이 과정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요소들도 생겨났다."

―무엇을 버렸나.

"수강생 수는 과감하게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예상보다 많은 수강생이 등록하고 있지만 개방형 무료 강의의 엄청난 수강생 수와는 여전히 비교가 안 된다. 탄탄한 수강생 네트워크와 수강생 수, 이 둘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 회사'에 딱 맞는 전략이 무엇인지 어떻게 고르나.

"'우리의 고객은 누구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라. 모든 회사의 소비자는 다르다. 연결하고자 하는 소비자 집단을 우선 확실히 정한다면, 가야 할 길이 좀 더 명확히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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