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겸손한 이성계 조선 경영 500년… 오만한 나폴레옹 10년 통치 '끝'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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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06.30 03:00

      [장대성의 제왕 경영학] <6> 태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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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윤혜연
      기업의 가장 중요한 철학은 고객을 왕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겸손해야 한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하급자에게도 반말하지 않고 예절을 갖췄다. 그런 겸손을 무기로 신진 사대부들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를 건설했다.

      부원(附元)에서 친고려로 전향

      이성계는 1170년 고려 무신난 주역인 대장군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6대 후손이다. 1174년 이의방이 정균에 의해 살해당한 후 그의 동생 이린은 도주했다. 이린의 손자이자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목조)는 원의 벼슬을 받은 뒤 부원파(친원파)가 되어 두만강과 함경도 덕원 지방에서 행세를 했다. 이성계는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자춘은 동북면(함경도)에서 사병 2000여명을 거느린 부원파 호족이었다.

      이성계가 20세 때 원제국은 쇠퇴하고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해 고려 31대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시작했다. 이성계와 부친 이자춘은 원나라 붕괴를 예측하고 친고려로 전향, 공민왕을 도와 동북면을 원의 지배로부터 고려 영토로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이자춘은 동북면 병마사가 됐고 개경으로 이주했다. 친일파가 일본 패망 직전 항일 독립군으로 변신하여 애국자로 옷을 갈아입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 대륙을 향해 품은 야망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두만강을 넘나들며 만주 대륙에서 말을 달렸다. 북방의 여진족·몽골족과도 친교를 맺었다. 이성계 평생의 동지이며 의형제인 이지란은 함경도 북청 지역 여진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촌 하나가 청 태조 누루하치의 6대조다. 이성계는 이민족 소년들과 북방에서 말을 달리며 중원 지배의 꿈을 키웠다. 이성계는 타고난 무인 기질에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을 보태 무술은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황소 뿔을 한 손으로 잡고 꼼짝도 못하게 할 정도의 천하장사였고, 기마술의 천재이자 270m 거리에서도 백발백중시키는 신궁이었다. 근접 백병전에서도 활로 적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총이 없던 그 시절 북방에서 최고의 무술 실력을 갖춘 이성계는 몽골족·여진족 등의 북방 기마민족들로 혼성 기마부대를 편성하고 지휘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에 고려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중원에 대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이성계는 공신으로 동북면 병마사가 된 부친과 함께 개경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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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317호 조선태조어진(태조 이성계 초상화).
      겸손한 백전 불패의 명장

      개경에 온 이성계는 공신의 아들이지만 도성 귀족 청년들에게 촌사람이라고 무시당했다. 그는 굴욕을 참으면서 적보다 등 뒤에서 배반하는 아군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내부의 적을 안 만드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면서 몸을 낮추었다. 하급자들에게도 먼저 인사를 하는 예를 올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성계는 1361년 8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 만호 박의를 잡았는데 2개월 후인 1361년 10월 홍건적 20만명이 개경을 점령했다. 개경을 탈환하는 1362년 1월 군사작전에 27세 청년 이성계는 사병 2000명을 데리고 선봉에 섰다. 난공불락이던 동문을 격파하고 대승했다.

      몇 달 후 요동 지역 원나라 군벌 나하추가 수만 군대로 동북면을 공격했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고 출진시켰다. 이성계 부대는 적 병력의 10분의 1 수준이었지만 사령관이 된 그는 선두에 서서 나하추의 가장 용맹한 장수가 탄 말의 목을 활로 적중시켰다. 화살 맞은 말이 비틀거리자 적장이 말의 고삐를 당기느라 "워 워 워" 하면서 입을 벌리자 그 순간 적장의 입속으로 화살을 명중시켜 사살했다. 그 이후 이성계는 약 30년간 몽골군·여진족·왜구 등과 수많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한 상승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승승장구할수록 이성계는 병사들을 더 따뜻하게 해주고 잘못을 용서해주며 안아주었다. 이성계는 최고 계급의 상장군이지만 부하 장수들에게 반말하지 않고 상관에게 대하듯 예를 다했다고 한다. 적군 포로들도 감화시켜 자기 친위 부대에 배속시켰다. 격의 없고 소탈한 그는 주위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고려 군인들 모두 그의 지휘를 받고 싶어 했다. 이성계는 '장수는 학자의 의견을 갈구해야 한다'는 고전의 가르침에 따라 신진 사대부들을 존경하고 우대했다. 이런 파격적인 그의 겸손 자체가 개혁적이어서 개혁파 사대부들인 정도전·조준·윤소종 등은 물론 온건파 정몽주도 좋아하고 따랐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끝까지 포용하려 했고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독단적으로 암살을 감행하는 바람에 이성계가 대로(大怒)했다고 전해진다.

      백성 위한 혁명적 토지개혁

      위화도 회군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겨냥한 다음 목표는 토지개혁이었다. 고려 말에는 권문세가 귀족들과 사찰들이 농민들 땅을 빼앗아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고 수확량의 80% 이상을 소작료로 강탈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조준과 함께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계획했다. 그런데 대지주인 원로 이색과 사대부들이 반대했고 정몽주는 애매모호한 중립을 취했다. 군사력을 가진 이성계파는 1390년 공양왕 2년에 권문세가의 토지문서들을 압수해 불태우고 국유화했다. 토지문서들이 불에 타는 3일 동안 백성은 춤을 추며 이성계를 칭송했다. 토지개혁 주목적은 국유화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해주고 세금으로 수확량의 10%를 받는 제도 수립이었다. 그러나 회의 참석자 중 3분의 2가 토지를 소유한 터라 반대가 거셌다. 대신 관청과 현직에 있는 관리에게만 토지를 사용하게 하는 과전법을 만들어 시행했다. 그나마 권문세가와 사찰 횡포는 없어진 게 소득이었다.

      자기 종교 대신 신진 사대부 이념 채택

      토지개혁으로 인심을 얻은 이성계는 고려 조정 백관들의 추대로 1392년 7월 왕에 올랐다. 조선이라는 새 국가를 창건하는 역성혁명이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이성계는 불교 대신 신진 사대부들의 철학이었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대단한 양보였다. 군사력을 소유한 이성계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 사대부들의 조인트 벤처 국가가 조선이었다.

      이후 이성계는 개국 초부터 내정 압박을 하던 명나라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군사력을 기르고 1398년 8월 요동 출병을 결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중병이 찾아와 뜻을 이루지 못했고, 권력 공백을 이용해 5남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요동 정벌을 반대하던 이방원과 그 일파는 요동 정벌을 계획한 정도전·남은 등을 모두 제거했다. 이성계는 얼마 후 이방원(3대 태종)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태상왕으로 있다가 만 73세에 운명했다.

      전쟁포로로 52세에 결국

      황제 즉위 나폴레옹 정복욕 불타 유럽 정벌 시작
      웰링턴에 패해 귀양살이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최고 영웅으로 추앙되긴 하나 생의 후반은 전쟁 포로로 마감했다. 그는 1769년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섬에서 출생, 친프랑스파 코르시카 귀족인 부친을 따라 파리로 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24~26세 무렵 육군 대위였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후 2번에 걸친 반란을 포격으로 진압한 공으로 27세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곧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주도 밀라노를 점령했고 그 후 2차 원정에서는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정벌했다. 그는 이런 천재적인 군사 작전으로 오스트리아, 이집트 등을 정벌하여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환영을 받았다.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나폴레옹은 루소 등 계몽 사상가에게 영향을 받아 민주공화제에 심취하였지만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도취해 정복 야망을 키우는 등의 이중적 성격이었다. 1804년 35세 때 국민투표로 황제로 즉위한 뒤엔 정복욕이 불타올라 유럽 정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1805년 프랑스·스페인 연합 해군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 패배하면서 영국 정벌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에도 1812년 광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의 기후와 지리적 환경은 물론 군대에 관하여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원정을 감행했다. 출진 병력 60만 대군 중 겨우 5만명 정도가 프랑스로 생환하는 완패를 당했다. 오만과 독선이 결합한 결과였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에 체포되어 전쟁 포로로 엘바섬으로 귀양 갔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에서 탈출 후 재기하여 100일 천하를 누리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과 연합군에 패배하여 다시 체포됐다. 다시 전쟁 포로가 되어 영국 군함에 실려 남대서양 고도 세인트헬레나섬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 유배지에서 귀양 생활을 하다 1821년 52세에 죽었다.

      이성계와 나폴레옹 모두 변방 시골 출신으로 혼란기에 반란군을 진압하고 20대에 장군이 된 군사의 천재들이며 후에 국가 통치자가 되는 등 비슷한 면이 많다. 그러나 정복욕에 빠져 포로로 생을 마감한 나폴레옹과 비교하면 이성계는 인생과 조직 경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진정한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