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5년 헨리 2세가 첫 인증… 국경 장벽 없는 품질 보증수표"

입력 2018.06.16 03:00

[Cover Story] 英왕실 인증 어떤 기업이 어떻게 받나
리처드 펙 英 왕실인증보유자협회 사무국장 인터뷰

리처드 펙 영국 왕실인증보유자협회 사무국장
리처드 펙 영국 왕실인증보유자협회 사무국장
런던 버킹엄 궁전 입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버킹엄플레이스 1번지에는 왕실인증보유자협회(The Royal Warrant Holders Association)가 자리 잡고 있다. 왕실 인증 기업들이 회원인 이 협회는 왕실 인증 과정을 관리하고 회원 기업들을 교육한다. 리처드 펙(Peck·67) 왕실인증보유자협회 사무국장은 2층 집무실에서 기자를 맞았다. 테이블 위에는 고풍스러운 찻잔에 담긴 홍차와 우유, 설탕 통이 놓였다. 그는 "왕실인증보유자협회의 전신은 왕실 인증을 받은 기업 25곳이 1840년 설립한 왕실상인협회"라며 "왕실 인증을 오·남용하는 일을 막기 위해 설립된 게 시초"라고 설명했다.

영국 왕족이 사용하는 제품을 공급하는 기업 중에서도 엄선된 업체들만 받을 수 있는 왕실 인증의 역사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155년 헨리 2세가 섬유·의류 기업인 위버스컴퍼니(Weavers' Company)에 일종의 왕실 공식 허가증에 해당하는 로열차터(Royal Charter)를 수여한 것이 최초의 왕실 인증 기록이다. 지금과 같은 왕실 인증을 가장 처음 받은 기업은 영국 최초로 인쇄기를 개발한 윌리엄 캑스턴(Caxton)으로, 왕실에 인쇄기를 공급하게 되면서 1476년 왕실 인증을 받았다.

'위대한 영국' 상징으로 부여

왕실 인증 제도는 영국의 국가적 번영사(史)와 맞물려 발전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재임 기간(1558~1603년)에 더 다양한 기업과 장인에게 왕실 인증이 부여되기 시작했고, 빅토리아 여왕 재임 기간(1837~1901년)에는 인증을 받은 기업 수가 급증했다. 빅토리아 여왕 즉위 당시만 해도 200곳에 불과하던 왕실 인증 기업은 그의 치세 말기 2000곳으로 불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영국 제조업체들은 수출을 독려하던 영국 왕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 시기에 급성장했다. 오늘날 영국 경제와 기업에 영국 왕실의 인증은 어떤 가치를 지닐까. 펙 사무국장은 "기업에 품질 개선과 혁신을 위한 동기를 부여하는 훌륭한 자극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우선 왕실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좋은 서비스와 제품을 제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품질과 서비스에 대한 신뢰도 역시 높아야 한다. 한마디로 해당 분야 선두 기업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왕실 인증을 보유한 기업들은 아무도 '우리 회사가 최고'라고 스스로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기업들이 바로 왕실이 즐겨 사용하는 제품을 생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왕실 인증은 최고의 품질 보증서 같은 역할을 한다. 소비자들은 왕실 인증 기업이라면 높은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인증을 받은 기업들도 이런 사실을 긍지로 여긴다. 왕실 인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품질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제품의 질과 서비스부터 직원에 대한 처우나 고객 관리법 같은 경영 전반을 혁신해 훌륭한 기업으로 남기 위해 애써야 왕실 인증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에는 엄청난 자극이다."

경제적 가치는 환산한 적 없어

―왕실 인증의 역사는 거의 900년에 달한다. 어떻게 이 전통이 잘 유지될 수 있었나.

"왕실 인증 문양은 '해당 기업의 제품을 왕실에서 현재 사용 중'이라는 증명서나 공급 계약서와 다름없다. 왕실 인증 제도는 구닥다리 같은 제도라는 이야기도 듣곤 하는데, 바꿔 말하면 그만큼 오랜 시간을 거쳐 정립된 제도라는 뜻이다. 인증 기업 선정과 인증 관리 역시 관련 법에 따라서 엄격하게 이뤄진다. 예컨대 왕실 인증 문양도 왕실의 재산에 해당한다. 기업들이 가게에 왕실 인증 문양을 걸어둘 수 있는데, 이 역시 왕실로부터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다. 인증 기업들 역시 자체적으로 노력을 거듭했다. 장수 인증 기업들 중 자체 전통을 고수해온 경우가 많다. 모자 전문 제임스 록(James Lock & Co), 구두 제작업체 존 롭(John Lobb), 정장을 만드는 기브스앤드호크스(Gieves & Hawkes) 등은 전통 생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조 방식을 현대화하고 제품을 혁신한 곳도 적지 않다. 단추 전문인 퍼민앤드선스(Firmin & Sons)가 혁신에 적극적이었다. 이름이 잘 알려진 영국 기업이라면 대부분 왕실 인증을 갖고 있다고 봐도 된다. 해외 시장에서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요소인 만큼, 인증 기업들은 이를 홍보에 활용한다."

―왕실 인증의 경제적 가치를 환산할 수 있나.

"사실 경제적 가치를 정확한 숫자로 환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왕실 인증을 받으면 직접적인 매출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향력, 즉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하는 효과가 크다는 점이 있다. 예를 들어 (홍차 브랜드로 유명한 식료품 유통업체) 포트넘앤드메이슨은 브랜드 앞에 왕실 인증 수식어가 반드시 따라 붙는 업체로 왕실 인증이 기업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19세기 후반부터 영국 기업들은 영국의 왕실 문양이 사업에 유리하고 특히 수출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본이나 한국, 대만, 중국 같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중동이나 미국 시장에서도 양상이 비슷했다. 현재 왕실 인증 기업의 30~40%가 수출 지향적 기업이기 때문에, 왕실 인증이 브랜드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클 것이다. 실제로 한 회원 기업에서 전하기를, 외국에서 제품을 주문하면서 '당신 기업이 왕실 인증을 받은 곳이라 선택했다'고 이야기했다더라."

제품 선택할 때 굳이 국적 안 따져

―외국 기업들도 왕실 인증을 받을 수 있나.

"물론이다. 삼성전자도 왕실 인증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 영국 법인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텔레비전과 오디오·시각 제품 공급 업체'로 왕실 인증을 받았다.) 현재 인증을 받은 기업의 5% 정도는 외국 국적이다. 예컨대 샴페인이나 타바스코 소스처럼 영국에 (관련 유명 기업이) 드물거나, 헬리콥터나 전자제품처럼 외국 기업 제품이 더 뛰어난 경우는 그럴 수밖에 없다. 영국 왕실은 제품을 선택할 때 굳이 국적을 따지거나 불필요하게 진입 장벽을 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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