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로 만들면 뻣뻣해져' 필립 공·오나시스·앤디 워홀… 그들이 사랑한 수제 구두

입력 2018.06.16 03:00

[Cover Story] 英왕실 인증 기업 3곳 르포 - 존 롭

존 롭 구두
런던 버킹엄 궁전 바로 앞에 뻗은 세인트 제임스(St. James)가엔 왕실 인증 기업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1600년대 개장한 와인 판매상, 윈스턴 처칠 전 총리가 즐겨 쓰던 모자를 파는 가게…. 첫눈에 봐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상점을 지나다보면 창가에 구두를 가득 진열한 구두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1863년부터 영국 왕실 일가용 구두를 만들어온 맞춤형 구두점 존 롭(John Lobb)이다. 에드워드 그린과 함께 영국 신사 명품 구두 양대 산맥으로 통하는 브랜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남편인 에든버러 공작(필립 공)은 존 롭 구두를 40년째 신고 있다. 역대 영국 총리나 애리스토틀 오나시스(선박왕), 앤디 워홀(미술가), 프랭크 시나트라(가수), 딘 마틴(배우), 버나드 쇼(작가) 등 상당수 유명인이 존 롭 애호가로 이름을 올렸다.

가죽 구두 590만원, 악어 가죽은 1450만원 선

가게 안에 들어서니 구두 수선점 같은 내부에서 장인 서너 명이 구두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에스콰이어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게'라고 부른 그곳이다. 한쪽에선 사제 간으로 보이는 두 명이 신발 재료로 사용할 가죽을 탁자에 펼쳐놓고 점검하고 있었고, 지하 1층 작업실에서는 손수 구두 밑창과 본체를 한 땀 한 땀 매듭짓는 직원이 눈에 띄었다.

가게 운영을 총괄하는 조너선 롭(Lobb) 매니저는 "기계로 박으면 가죽이 뻣뻣해진다"면서 "손으로 꿰매야 구두 가죽이 부드러워져 착용감이 좋아진다"고 설명했다. 존 롭에서 만드는 구두는 전부 맞춤형 수제화다. 제작을 의뢰한 고객 발 치수를 재고 한 켤레를 만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6개월. 가격은 기본 가죽 구두가 약 4000파운드(약 590만원), 악어 가죽을 활용한 구두는 1만파운드(약 1450만원)를 웃돈다.

존 롭
1851년 영국 서남부 콘월 출신 22세 청년 존 롭은 일자리를 찾아 런던으로 상경했다. 한 구두 장인의 견습공으로 훈련을 받은 그는 몇 년 후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구두 제작 실력을 인정받았다. 1863년엔 에드워드 왕자(에드워드 7세) 눈에 들어 왕자의 구두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주목을 받았다. 1866년엔 자신의 이름을 내건 구두점을 열고 맞춤형 구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런던 거리 수제 구두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존 롭은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불황 영향을 받지 않는 왕실과 상류층이 주요 고객이었던 데다, 가문 내 철저한 도제식 규율이 끊기지 않고 전승되면서 최고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너선 매니저는 창업주 존 롭의 6대손이다. 그는 "아버지 밑에서 견습공으로 25년간 일을 배웠고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로부터 구두 제작과 관련된 모든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받았다"고 전했다. 그 역시 구두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족형(足形·구두 틀)을 만드는 장인이다. 족형은 고객의 발 모양을 본떠 나무를 깎아서 만들며, 모든 구두 제작의 기반이 된다. 지하 1층 보관실에는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존 롭에 구두를 주문한 고객의 족형이 3m 높이 천장까지 닿는 대형 구두장 수십 개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수많은 장인 손길이 살아 있는, 세대를 초월한 기술과 전문성을 보존하고 있는 현장이다. 조너선 매니저는 "족형을 보관하기 때문에 우리와 한 번 구두를 맞춘 고객은 새 구두를 주문할 때 치수를 다시 잴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외주 장인 30여명, 엄격한 교육 통해 품질 유지

존 롭에서 구두를 만드는 방식은 창업 초기인 150년 전과 거의 동일하다. 한 켤레 구두를 완성하기까진 적어도 기술자 7명이 필요하다. 족형 기술자, 본체 기술자, 밑창 기술자, 구두에 사용되는 가죽 관리와 절단을 담당하는 장인 2명, 고객 치수를 재는 맞춤 기술자, 완성된 구두를 닦는 전문가 등이다. 구두 종류에 따라 장인 2~3명이 더 투입되기도 한다. 조너선 매니저는 "이들은 15~20년 이상 경력이 있는 전문가"라면서 "기본적으로 4~5년 견습 기간을 거친 뒤 최소 5년간 실무 경험을 통해 실력을 검증받은 다음에야 전문가로 인정해 실전에 투입한다"고 말했다. 현재 존 롭 직원으로 고용된 기술자는 20여명이다. 주문이 폭주하면 이 인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이따금 프리랜서 장인에게 외주를 맡길 때도 있다. 조너선 매니저는 "외주 장인 30여명까지 존 롭에서 별도로 교육을 받도록 해 일관성 있는 품질과 전문성을 보장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 존 롭 상표는 2개… 프랑스 에르메스 그룹은 기성품 만들어"

'존 롭' 조너선 롭 매니저

존 롭을 총괄하는 조나선 롭 매니저는 “(품질을 유지하려면) 꾸준히 기술을 연마하고 일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말했다.
존 롭을 총괄하는 조나선 롭 매니저는 “(품질을 유지하려면) 꾸준히 기술을 연마하고 일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재 영국 맞춤형 구두점 존 롭(John Lobb)의 이름을 사용하는 기업은 2곳이다. 프랑스 에르메스 그룹도 같은 이름의 명품 구두 브랜드를 운영한다. 에르메스는 영국 존 롭이 프랑스 파리에 낸 해외 지점을 1976년 인수하면서 브랜드 사용권도 취득했다. 이름은 같지만, 런던의 창업 본사와는 별개 사업이다. 조너선 롭 매니저는 "에르메스에서 운영하는 존 롭은 공장에서 기성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하고 우리는 주문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장인이 맞춤형 수제화를 제작한다"면서 차이를 설명했다. 에르메스의 존 롭은 한국에도 갤러리아 백화점과 신라면세점에 매장을 두고 있다. 두 기업 중 수제화를 만드는 영국 존 롭만 왕실 인증을 보유하고 있다. 구두 가격도 영국 존 롭이 평균 4~5배 비싸다.

조너선 매니저는 "장인이 직접 만드는 수제화와 공장에서 찍어내는 구두의 차이는 가죽"이라고 했다. 품질 좋은 가죽을 쓴다는 점에서는 공장에서 만드는 에르메스의 존 롭이나 장인이 만드는 영국 존 롭이 비슷하다. 하지만 사용하는 가죽의 부위는 다르다. 그는 "공장에서 만드는 신발은 가죽을 통으로 다 사용하지만, 우리는 가죽 기술자가 가죽을 세심하게 점검한 뒤 가장 좋은 부위만 골라낸다"고 강조했다. 발에 가장 편한 가죽으로 구두를 만든다는 것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구두는 수명이 길고 잘 숙성된 와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보기에도 좋고, 신는 것도 편해진다는 게 롭 일가의 자랑이다. 실제 존 롭에서 주문 제작한 구두를 30~40년씩 신는 고객도 흔하다. 조너선 매니저도 인터뷰 도중 자신이 신고 있는 검은 존 롭 수제화를 보여주면서 "20년 넘게 신고 있다"고 말했다.

런던 세인트 제임스가에 자리한 존 롭 구두점 내부 모습.
런던 세인트 제임스가에 자리한 존 롭 구두점 내부 모습. / 이재은기자
그는 존 롭의 장수 비결로 전통을 고수하는 뚝심을 꼽았다. 조너선 매니저는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구식(舊式)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고급 수제화를 만들려면 전통과 규율이 중요하다"고 했다. 고풍스러운 붉은색 벽지로 도배된 그의 사무실에는 영국 왕실 구성원으로부터 받은 주문서와 편지가 걸려 있었다. 최근 해리 왕손 결혼식을 위해 구두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만들었다고 해도 알려줄 수는 없다"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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