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은 떨어진 섬들을 잇는 다리 만들기"

입력 2018.05.19 03:00

[Cover Story] 현대예술계 가장 영향력 있는 큐레이터

[Cover Story] 현대예술계 가장 영향력 있는 큐레이터
미국 현대미술가 이안 쳉(Cheng)의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예술 프로젝트. / 서펀타인갤러리

영국 런던에 있는 현대미술 전문 서펀타인갤러리(Serpentine Gallery)를 지휘하는 한스 울리히-오브리스트(Ulrich-Obrist·50) 예술감독은 현대예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울리히-오브리스트 예술감독이 단지 능력 있는 전시 기획자에서 더 나아가 영향력 있는 예술계 인사로 도약한 비결은 뭘까. 그는 큐레이터가 "연결점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경영인들이 주목하는 큐레이션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전시를 통해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은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떨어진 섬을 잇는 다리를 만드는 셈이다. 그동안 기획한 수많은 전시는 사회 각계각층 인사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이었다. (미국 실험적 공연예술가) 로리 앤더슨이 항공우주국(NASA) 주최 교류 프로그램(거주 공간 제공)에 참여했던 경험을 나에게 전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공공기관이나 기업이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건 멋진 아이디어다. 예술을 사회의 중심에 두면서 예술가에게도 기업인에게도 새로운 경험과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디크 칸 런던시장은 올여름 서펀타인갤러리의 (유명한 후원 프로젝트인) '파빌리온'을 주관하는데 멕시코 건축가 프리다 에스코베도(Escobedo)와 협업해 예술가 관점으로 환경 대책을 모색할 계획이다. 서펀타인갤러리에서 기획한 이안 청의 전시는 기술을 예술에 접목한 사례다. 큐레이터는 이런 식으로 사회에 관여한다."

―최근 들어 경영인들이 큐레이션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큐레이터 생활을 한 지 25년 정도 됐는데, 2000년 초반부터 큐레이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 즈음 출간된 예술 분야 큐레이션 서적이 수천 권씩 팔리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 고무되어 큐레이션 역사에서 영감을 준 인물들에 대해 책을 썼는데, 베스트셀러에 올라 깜짝 놀랐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건축 등 다른 취향을 가진 독자들도 관심을 많이 보였다고 하더라.

곰곰이 이유를 따져보니 세 가지 정도가 떠올랐다. 우선,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큐레이터처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자주 겪게 됐다. 또 음악·과학·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도 박물관이 있기 때문에 아마 전시와 큐레이션을 연관시켜 생각했을 수 있다. 세 번째로, 지금은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는 시대라는 점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예술의 역사는 오브제(object·사물이나 물체를 가리키는 미술 용어)의 역사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개념미술(conceptual art)과 예술의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가 시작됐다. 오브제 중심에서 비(非)오브제와 유사 오브제, 개념화, 아이디어 자체 등으로 범위가 커졌다. 그러자 이를 다루는 큐레이션의 개념도 전보다 확장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과학자·발명가 등 만나 영감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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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한국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나.

"그동안 예술가부터 과학자, 발명가 등을 만나 꾸준히 인터뷰를 했다. 경영학에서 보니 '블루오션'과 '레드오션'을 나누는 기준이 흥미로웠다. 경쟁자가 많은 시장을 피해 다들 블루오션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경쟁자가 많더라도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찾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평소에 세계 곳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그 과정에서 생긴 연쇄반응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자주 얻는다.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를 만났을 때, 그가 손글씨가 점점 사라진다고 아쉬워한 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얼마 후 연말 행사에서 참가자들과 산책하던 중 비를 피하러 들어간 카페에서 다 같이 시를 쓰다가, 손글씨를 실제로 본 지 오래됐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손글씨를 부활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만난 젊은 예술가가 스마트폰에 인스타그램을 설치해줬다. 전에는 소셜미디어를 잘 들여다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만나는 화가나 건축가, 예술가들에게 종이를 주고 글이든 그림이든 직접 남겨달라고 부탁한다. 그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렇게 작은 만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매일 새로운 작품을 올리는 '온라인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다."

―큐레이션이란 '선택하는 작업'이다. 어떻게 알맞은 주제와 대상을 고를 수 있나.

"선택과 선별은 연(年) 단위의 연구와 조사를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수많은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항상 자문한 건 '지금 이 시점에서 뭐가 시급한가, 뭐가 필요한 것인가'다. 갤러리나 미술관에 필요한 건 뭘까. 나아가 그 개최 도시에선 뭐가 시급할까. 더 나아가 이 세계는 뭘 요구하고 있나. 그런 고민이다.

그다음은 이렇게 추려낸 '필요한 것'들 중에서 '시급한 것'은 뭔지 따져본다. 프랑스 사회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Latour)는 '합성주의자 선언(A Compositionist Manifesto)'에서 새롭게 배치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큐레이션 작업을 평가할 때 중요한 건 '어떤 걸 선택하는가'에 그치지 않는다. 선택한 요소들을 '어떻게 합성하느냐'도 중요하다. 큐레이션은 이전까지 따로 떨어져 있던 예술을 다른 분야와 연결하고 결합하는 일이다."

호기심과 사회의식 갖고 있어야

―큐레이션을 잘 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은 없나.

"예술 분야에선 예술가들과 협업하면서 큐레이션에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청소년 시절부터 예술가들과 대화하고 교류해왔는데, 그 만남의 장이 '학교'였다. 큐레이터는 의제를 상정하는 역할도 한다. 훌륭한 예술가들과 대화하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중요한 점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작품들을 보고 또 봐야 하고,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실제로 들어야 한다. 이 세계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겸허하게 듣고 이를 통합해야 한다.

좋은 스승(mentor)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카스퍼 쾨니히(Köenig·전 쾰른미술관장)나 루이비통창조재단 수잔 파제(Page) 예술감독(전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장)이 내겐 진정한 스승이었다. 또 대학생이던 1980년대 경제학과 생태학이 동시에 중요하게 다뤄지던 시절, 정치학과 경제학, 생태학을 같이 공부하면서 스승이던 (한스 크리스토프) 빈스방어(Binswanger) 교수 덕분에 성장의 한계,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 환경 문제로 인한 경제적 비용 등에 대해 많이 배웠다. 예술 큐레이션 작업을 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측면을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건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예술 큐레이터 역시 사회의 구성원이란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둔다. 경제적 불평등 같은 사회 문제가 세계 곳곳에서, 특히 도시에서 임계점에 다다른 상황이다. 미술 전시를 기획하며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문제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큐레이터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에 그치지 않고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어야 한다. 큐레이터로서 원동력은 호기심이다. 언제나 뭐든 알고 싶어 하고,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야 한다. 개인적으론 사회과학(경제학·정치학)을 전공하고 평소 읽고 쓰는 데 관심이 많은 점이 큰 도움이 됐다. 다양한 콘퍼런스를 찾아다니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해 배웠고, 직접 모임과 행사를 조직했다. 서펀타인갤러리 야나 필(Peel) 최고경영자(CEO)와 마이클 블룸버그 회장(전 뉴욕시장) 등 훌륭한 이사진들과 함께 하는 콘퍼런스는 자극이 된다. '마라톤'이란 제목으로 진행하는 지식 콘퍼런스는 지난해 인공지능(AI)을 주제로 컴퓨터 과학자, 예술가, 윤리학자 등 각계 전문가 수십명이 모여 토론했다. AI 활용은 기술적인 면 외에 윤리적인 문제와 일자리의 미래 같은 사회적 쟁점과도 맞닿아 있다. 보편적 기본소득도 여기서 파생되는 주제다. 큐레이터도 이런 데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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