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그들의 손이 닿으면 사물이 돈이 된다

    • 0

    입력 2018.05.19 03:00

      [Cover Story] '큐레이션의 마술' 한스 울리히-오브리스트 서펀타인 갤러리 예술감독

      이미지 크게보기
      ① 서펀타인갤러리에서 열린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전시회 ‘초기 그림과 소묘’. ② 패션 큐레이션업체 스티치픽스의 옷 추천 화면. ③ 서펀타인갤러리에 전시된 한국 예술가 이우환의 설치 작품 ‘관계항(Relatum: Stage)’. ④ 넷플릭스가 고객 취향에 맞춰 영화·드라마를 큐레이션 해 놓은 화면.

      영국 런던에서 가장 큰 공원인 하이드파크 한가운데에 현대미술 전문 서펀타인(Serpentine)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지휘하는 인물은 한스 울리히-오브리스트(Ulrich-Obrist) 예술감독. 70년 전통을 가진 영국 예술 전문 매체 아트리뷰(ArtReview)가 해마다 발표하는 '현대 예술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Power 100)'에서 2009년과 2016년 두 차례나 1위에 오른 큐레이터다. 미술 시장을 좌우하는 화상(畵商)이나 수집가, 창작자도 아니고, 유명 미술관도 아닌 갤러리 소속 큐레이터가 2회 이상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큐레이터인 그가 어떻게 이렇게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을까.

      울리히-오브리스트 예술감독은 WEEKLY BIZ 인터뷰에서 "인터넷·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누구나 '큐레이터적인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라면서 "일상생활에서 놓이는 자잘한 선택의 순간뿐 아니라 과학·경영·예술·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 지식을 모아 연결한 다음 가장 좋은 결정을 이끌어내는 게 큐레이션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큐레이션은 정보 과잉 시대 돌파구

      큐레이션은 콘텐츠를 선별해 공급하는 일을 가리킨다. 원래는 미술관·박물관에서 작품을 관리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curator)'에서 파생한 단어다. 어원은 '돌보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큐라레(curare)에서 왔다. 17세기 무렵부터 귀족들이 유명 미술품을 수집한 다음 집에서 전시하는 풍토가 확산하면서 이 작품들을 관리하는 전문가(큐레이터)가 필요해졌고, 이들이 흐름을 주도했다.

      예술계에서 시작한 큐레이션은 이제 패션, 영화, 음악, 도서, 유통 등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 지식총서인 옥스퍼드핸드북 시리즈의 마이클 바스카(Bhaskar) 공동편집장은 "인터넷의 보급으로 정보 과잉 사회가 되면서 가치 있는 정보를 선별하고 (쓸모없는 것을) 덜어내는 기술이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집을 새롭게 꾸미고 싶을 때, 구인·구직을 할 때,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책을 읽을 때도 큐레이션은 중요한 과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옷을 고르거나 음식을 먹으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데이터와 취향을 결합시켜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를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게 큐레이션이다. 작가이자 유명 블로거인 로버트 스코블(Scoble)은 큐레이션을 "세상에서 패턴을 발견하고 그걸 전달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큐레이션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다. 전문 지식이 없는 큐레이션은 단순 스크랩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 편집을 뛰어넘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큐레이션 기술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클레이 셔키(Shirky) 뉴욕대 교수는 "정보 과잉이란 없다. 단지 여과를 제대로 못 했을 뿐"이라고까지 단언한다.

      토이저러스는 파산, 세포라는 질주

      바스카 편집장은 "큐레이션 자체로는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지만, 큐레이션을 비즈니스 모델에 적절히 활용하는 능력이 점차 기업 생존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온라인·모바일 쇼핑 시장이 커지면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는 유통업계가 좋은 예다. 미국 글로벌 장난감 유통체인 토이저러스는 지난 3월 파산을 신청한 뒤 자산을 매각 중이고, 영국 전자제품 유통체인 마플린(Maplin) 역시 점포를 정리하고 있다.

      반면 특정한 콘셉트의 제품이나 브랜드를 한데 모아 판매하는 형식인 '편집(編輯)숍'은 오프라인 유통 시장에서도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프랑스 화장품 유통 체인인 세포라가 대표적이다. 타깃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폭넓게 갖춘 전략이 주효한 덕이다. 아마존 같은 온라인 유통 업체들이 비용 절감 능력을 앞세워 급성장한 탓에 유통산업은 '고강도 큐레이션을 거친 초고급 제품 브랜드'와 온라인쇼핑몰처럼 '가격 경쟁력이 강한 유통 브랜드'로 양 극단으로 재편되는 중이다. 영화제작자 스티븐 로젠바움(Rosenbaum)은 "검색의 시대가 끝나고 큐레이션의 시대가 시작됐다"면서 "큐레이션 하거나 도태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시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