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보다 900년 앞선 노예 해방, 공무원 공채… 한반도 新패러다임 세우다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입력 2018.05.05 03:00

[장대성의 제왕 경영학] <5> 고려 광종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왕건의 고려는 호족들과 함께 창건한 연합 국가였다. 호족들은 공신이 되어 지방에서는 토지를 확장하고 노비의 수를 늘리고 중앙에 진출해서는 권력을 잡고 자식에게 벼슬을 세습시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들은 마음에 안 들면 왕명을 무시할 정도였다. 왕권은 약한데 부인이 29명이고 왕자들이 25명이나 되니 후계자 쟁탈전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의 뒤를 이은 왕은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이며 왕건의 장남인 혜종이었다.

왕건이 궁예 부하이던 나주 사령관 시절 오씨와 동침했는데 임신을 안 시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건은 자신의 전우인 원로 장군 박술희의 도움으로 초라한 오씨 아들에게 왕위 계승을 시켰는데 2대 왕 혜종이다. 혜종은 2년 만에 왕권을 노리는 왕규에게 시달리다 병으로 죽었다. 3대 왕 정종은 서경 천도 문제로 공신들과 대립하다 왕이 된 지 4년 만인 27세의 젊은 나이에 천둥·벼락 소리에 병들어 죽었다 한다. 정종의 뒤를 이어 동복 동생인 25세 왕소가 4대 왕 광종으로 등극했다.

925년 태조 왕건의 3남으로 태어나

광종은 925년 태조 왕건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건의 세 번째 부인 신명순성왕후로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이다. 부인은 이복여동생으로 대목왕후 황보씨인데 외가는 황주의 호족이었다. 둘째 부인 경화궁 부인 임씨는 2대 혜종의 딸이니 광종의 조카딸이다. 광종은 이복 여동생과 조카딸을 맞이해 족내혼을 했다. 두 부인들의 성이 왕씨가 아니고 황보씨와 임씨인 것은 모친의 성씨를 따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성을 따르는 것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관습이었다. 왕건의 배다른 아들과 딸들이 족내혼을 한 이유는 왕실 재산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과 외척의 세력화를 막고 권력을 왕실에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광종은 담대하지만 사려 깊어 의지를 숨기고 공신들에게 겸손했다. 2000여 명 개국 공신들은 강력한 권세를 갖고 조정을 장악했고 왕까지 위협했다. 25세 청년 광종은 공신 세력의 무력화를 다짐했다. 몰래 장기 전략 계획을 세운 그는 7년 동안 조용히 당 태종의 '정관정요' 등을 공부하며 공신들이 행세 못할 신패러다임의 국가 시스템을 구상했다. 조정에서는 공신들 뜻에 잘 따르기 때문에 공신들은 신패러다임 구축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다. 광종은 등극 후 7년이 지난 956년 드디어 공신들에게 신패러다임의 포를 쏘며 공격했다. 과거 양민이었던 노비를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실시였다.

노비는 사유재산·노동력·병력

노비는 귀족들 사유재산이며 노동력과 동시에 병력이 있다. 이들이 사유화되는 바람에 국가 경제와 국방력에는 큰 걸림돌이었다. 국가 통제력이 상실된 신라 말기와 고려 초에 1개 연대 병력 규모인 3000여 명의 노비를 거느린 귀족도 있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 왕권이 약한 틈을 타 군대를 가진 호족 세력들은 통일전쟁 시 발생한 유랑민과 포로들을 노비로 만들었다. 또 일부 양민도 붙잡아 불법으로 노비로 삼아 경제력과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왕건도 공신들의 저항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고통 속에서 살았다. 개인에 속한 노비는 오직 주인만을 위해 일하고 세금도 내지 않기 때문에 사노비가 많아지면 국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가 장기 전략계획을 갖고 있는 청년 제왕 광종은 공신들이 불법으로 노비를 계속 증가시키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956년 광종은 과거에 양민이었던 노비를 전격 해방시켰다. 노비안검법이었다. 군대를 보유한 공신들의 노비 해방은 혁명 이상 가는 비상 사건이었다. 광종은 일부이지만 링컨보다 900년 앞서 억울한 노예들을 해방한 신패러다임을 실현한 인물이다. 광종의 부인이며 후원 세력이었던 대목왕후가 친정의 몰락을 우려해 강력한 반대를 했으나 광종의 의지를 막지 못했다. 양민의 신분으로 억울하게 종살이 하던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어 그들의 기쁨은 하늘을 찔렀다. 반면 공신들은 노비의 수가 감소함에 따라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화되어 불만이 대단했다. 그러나 광종은 비장한 각오로 한발도 물러서지 않아 노비안검법 시행은 성공했고 더 이상 양민들을 노비로 만들 수 없는 신패러더임이 구축됐다.

고려 광종
일러스트=윤혜연
과거제, 1000년 전엔 상상도 못할 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공공기관의 공정한 임용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앞서 광종은 이미 1000여 년 전에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한 관리 임용의 신패러다임을 구축했다. 지금은 공무원 임용시험이 당연하지만 1000여 년 전에는 공무원 임용시험인 과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광종의 과거 실시에는 국가의 새로운 인사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시에 공신들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목적이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관리 임용은 조상의 후광으로 세습됐다. 즉 혈통이 관리 임용 기준이어서 훌륭한 인재가 발굴될 수 없었다. 광종의 전격적인 과거 실시로 고질적인 관리 임용의 세습 대신 공정한 시험을 통하여 유능한 인재가 임용되는 신패러다임 채용 시스템이 역사상 처음으로 구축됐다,

노비안검법 시행 후 2년이 지난 958년 광종은 중국 후주인 쌍기의 권고에 따라 과거제도를 획기적으로 시작했다.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관리 인사에 관한 의견이 광종에게 수용됐다. 과거 도입으로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양인들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공신의 아들도 과거에 합격 못 하면 관리의 길이 막혔다. 어제만 해도 부친, 조부의 권세와 명성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공부 못하면 실직자 신세가 되었다. 그동안 무력으로 출세했던 무인들도 관로가 막혔다. 과거 과목인 유교 학문을 공부한 양인 계급과 지방 향리의 지식인들이 관리로 진출해 신진 사대부 계급을 형성했다. 자질이 부족한 공신 자제들은 관로가 막히자 공신 세력이 약화되는 반면, 관리임명권을 가진 왕의 인사권은 강화되었다. 과거제도로 서희, 강감찬 등 인물이 배출되었고 무과가 없어 무신정변까지 문반 중심 사회가 되었다.

신패러다임 반대한 공신들 숙청

광종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란 신패러다임을 시행해 기득권자들인 공신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화되자 공신들은 왕에 대하여 반항하기 시작했다. 광종은 개혁에 불만을 갖고 말썽을 부리거나 반항하면 누구든 가차 없이 처단했다. 왕족과 외척은 물론 왕건의 최대 공신인 유금필의 외손자도 죽이는 등 강경했다. 심지어 아들(5대 경종)도 의심하여 경계했다. 관복을 제정, 관리들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중앙 집권제도를 확립했다, 광종이 공신 숙청을 한 후 살아남은 공신들이 2000여 명 중 40여 명이었다니 그 숙청 규모는 역사상 최대 수준이었다. 이때 만든 과거제도는 고려를 거쳐 조선, 현재까지 국가 공무원 임용시험과 기업 공채시험 제도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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