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링컨의 노예해방과 이승만의 토지개혁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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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05.05 03:00

      링컨 노예해방은 인도적 목적보다 정치·경제적 의도 커
      대주주 지지로 대통령 된 이승만, 농지개혁법 공포해 소작농에 첫 농지 배분
      이후 근대화 과정서 필수적인 토지 수용… 대지주 사라져 성공해

      토지 개혁으로 근대화 기틀 놓은 이승만 대통령.
      토지 개혁으로 근대화 기틀 놓은 이승만 대통령. /이철원 기자
      토머스 딜로렌조는 저서 '링컨의 진실'에서 링컨이 노예해방을 단행한 건 인도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남북전쟁 전 미 남부에는 유럽에서 이주한 부자들이 거대한 목화 농장을 갖고 대저택에서 흑인 노예들을 부리며 귀족 생활을 누리면서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조지아주에서 경작되던 면화가 앨라배마와 미시시피, 루이지애나주로 퍼지자 흑인 노예가 많이 필요했다. 그때는 노예무역이 끝나 가고 있어 흑인 노예 가격이 급등했다. 이제 흑인 노예는 귀중한 재산이었다. 1850년대 남부 흑인 노예의 총자산 가치는 남부 총예산의 10배나 되었고 이 자산을 남부 상위 5% 정도의 농장 귀족들만이 소유했다.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는 남부와 달리 공장들이 많았고 링컨은 북부 상공인들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됐다. 그는 철도 회사 변호사 출신으로 전 미국을 철도로 연결해야 미국에서 산업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공장은 물론 철도 건설과 운영에도 수많은 노동자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선 노예해방이 필요했다.

      남부 농장 귀족들은 자신들을 약화시키려는 링컨과 함께 갈 수 없었다. 1861년 4월 남군이 먼저 북군 요새를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됐다. 전쟁 발발 후 1년 3개월이 지난 1862년 7월까지 전세는 북군에 불리했다. 링컨은 남부 정치·경제적 기반인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켜 남부 농장 귀족 세력을 붕괴시키지 않고는 미국 통합은 없고 미래도 없다고 판단했다. 유럽에선 이미 노예 거래를 금지해 노예해방은 국제적으로도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링컨은 1863년 1월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많은 남부 노예가 북으로 탈출했고 전쟁은 1865년 4월 북군 승리로 끝났다.

      토지개혁 덕에 인력·토지 활용 쉬워져

      한국의 경우 해방 때까지 국가총생산 대부분인 쌀의 1년 총생산량은 1500만 석 정도였는데 만석꾼 대지주 1명 수입이 매년 쌀 1만 가마 이상이었다. 만석꾼 농지는 약 250만 평 이상의 논이었고 소작농은 1000가구가 넘었다. 소작농들은 중세 농노와 다름없었다. 해방 당시 농민이 전 인구의 80% 정도였고 농민의 34%는 반소작농, 52%는 땅 1평 없는 순소작농이었다. 인구 0.1% 미만 극소수 대지주들이 국가 전 농지의 3분의 2 정도를 소유했고 순소작농들을 노예처럼 혹사하며 귀족으로 살았다.

      그런데 대지주 지지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지주제도를 없애는 농지개혁을 단행, 소작농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다. 지주제도를 없애 소작농을 자경 농민으로 만들고 대지주 기득권을 없애야 주력 산업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지주이며 지식인들인 한국민주당 세력은 이승만을 지지해 대통령으로 추대했는데 이승만은 이들과 협상을 거쳐 1950년 3월 농지개혁 법안을 공포했다. 대지주들 농지를 유상 몰수해 소작농들에게 장기 저리로 유상 분배했다. 소작농들은 난생처음 자기 농지에서 농사짓는 환희를 맛봤다. 1945년 순수 자작농의 비율이 14%였는데 농지개혁 후 그 비율이 80% 이상으로 증가했다. 5·16 쿠데타 이후 경제개발을 위해 도로와 공단 건설 등에 많은 토지가 수용됐는데 토지 수용을 방해할 정치 세력인 대지주들이 농지개혁으로 이미 사라져 경제개발 추진에도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