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등 12개국 집중연구… 레이거노믹스서 따온 新성장전략"

입력 2018.05.05 03:00

[최유식의 長江激流] (3) 런쩌핑이 밝힌 中 시코노믹스의 비밀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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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중국 경제는 4년 연속 하락세를 보이며 성장률이 6%대로 떨어졌다. 이즈음부터 중국 내에서는 성장 전망을 둘러싸고 전문가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다수 전문가는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인한 경기 하락세는 바닥을 쳤으며, 곧 경기가 반등할 것으로 봤다. 일단 경기가 회복되면 앞으로 10~20년 동안 7~8% 고성장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인민은행 통화정책위원을 지낸 리다오쿠이(李稻葵) 칭화대 교수는 2016년 1월 "구조조정과 개혁을 거치고 나면 중국 경제는 다시 7% 이상의 성장 속도를 회복하고, 이런 성장 추세가 10년 이상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정부 싱크탱크인 중국 국무원 발전연구센터에서는 성장률 변속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중국 경제가 연 7% 이상 고속 성장을 계속하는 시대는 지났으며, 성장 속도를 낮추고 산업 구조조정 등 필요한 개혁 조치를 단행해야 중진국 함정을 넘어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2016년 5월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지면에 등장한 한 '권위 인사'는 "중국 경제의 U자형 회복은 어렵고, V자형 반등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L자형 추세가 계속될 것이며, 이는 1~2년에 지나갈 수 없는 하나의 단계"라고 말했다. 이 '권위 인사'는 당시 공산당 중앙재경영도소조 주임을 맡고 있던 류허(劉鶴)로 추정됐다.

런쩌핑(任澤平) 헝다경제연구원장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거시경제연구부 연구원과 연구실 부주임 등으로 일하면서 성장 속도 변속론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작년 8~9월 팡정(方正)증권 주최로 베이징과 상하이, 선전 등지에서 열린 전문가 대상 강연회에서 류허 경제팀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경제정책인 '시코노믹스'를 이렇게 설계하게 된 구체적인 근거를 밝혔다. 그의 강연록은 류허가 올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 격)에서 경제 담당 부총리로 선출되면서 중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필독서가 됐고, 중국 소셜 미디어를 통해 대대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성장률 낮추고 구조조정 서두르자"

[최유식의 長江激流]
류허 중국 경제부총리가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연설하고 있다. / AFP
류허는 지난 2009년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내에 중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을 뛰어넘을 방안을 만들기 위한 연구팀을 설치한다. 런쩌핑은 이 연구팀의 일원이었다. 이듬해인 2010년 이 연구팀에서는 처음으로 성장률 변속론이 제기됐다. 성장률 변속론의 가장 큰 근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개발에 성공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국가들은 예외 없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1000달러 전후가 됐을 때 성장 속도를 4~5%로 줄이고, 산업구조 고도화와 과잉생산 해소, 주민 생활 개선 등 구조 개혁을 단행했다는 점이다. 중국의 지난해 1인당 GDP는 9000달러가량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100개가 넘는 전 세계 국가 중 성장 속도 변속을 통해 선진국 진입에 성공한 국가는 한국과 대만, 독일, 일본, 싱가포르 등 12개국에 불과하다. 독일은 1960년대, 일본은 1970년대, 한국과 대만은 1990년대에 각각 성장 속도 변속기를 맞았고 이 시기에 산업 업그레이드와 구조 개혁에 성공해 선진국에 합류했다.

한국의 실명제·빅딜도 연구

[최유식의 長江激流]
런쩌핑 헝다경제연구원장이 지난해 12월 한 언론사 행사에서 ‘신경제 신개혁’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왕이경제
한국은 1992년에 성장 변속기에 접어든 것으로 봤다. 초창기 한국 정부는 이런 성장률 저하를 인정하지 않고 돈을 풀어 경기를 자극하는 정책을 시도했다. 30대 대기업들 부채율이 급등했고, 결국 아시아 금융 위기를 맞아 강제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이 시기에 집권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성장률 변속기에 필요한 중요한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런쩌핑은 평가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부동산실명제와 금융실명제를 통해 현대국가 통치의 기초를 놓았고, 김대중 대통령은 빅딜을 통해 과잉생산 설비를 해소하고, 산업 집중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이런 개혁 덕분에 한국은 2000년대 들어 자동차와 조선, 철강 등을 중심으로 산업구조 고도화에 성공했다. 런쩌핑은 "1990년대 한국과 말레이시아는 1인당 GDP와 산업구조 등이 큰 차이가 없었는데, 2000년대 이후 한국은 1인당 GDP가 2만8000달러까지 올라간 반면, 말레이시아는 정체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고 했다.

인구구조도 변해 성장률 변속 불가피

[최유식의 長江激流]
성장 속도 변속론의 또 다른 논거는 중국 인구 구조의 변화이다. 중국은 다른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산업화 초기에 인구 보너스를 톡톡히 누렸다. 현재 중국의 주류 인구에 해당하는 41~56세 인구는 1962년생부터 1976년생까지로 출생자 수로만 따지면 2억8000만명에 이른다. 이들은 경제 개발이 본격화된 1990년대에 20~30세로 중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중국은 이 시기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매년 수출을 20~30% 늘렸다. 이들이 30~40세가 된 2000년대 중반부터는 부동산 시장이 급등하면서 투자 주도 성장의 기반이 됐다.

하지만 5년 뒤부터는 이 세대가 차례대로 은퇴하면서 고령화의 주역이 될 판이다. 한 자녀 정책이 본격화된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인구는 이 세대에 비해 그 숫자가 크게 줄어 중국은 지난 2012년부터 생산 가능 인구가 해마다 줄고 있다. 런쩌핑은 "생산 가능 인구 감소로 인해 중국 경제에는 이미 루이스 전환점이 나타났고,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수출 둔화 현상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루이스 전환점이란 개도국이 경제 개발 초기에는 농촌의 저렴한 인력 유입으로 급속한 산업 발전을 이루지만, 도시로 이동할 농촌 노동력이 고갈되는 시점에는 임금이 급등하면서 성장이 둔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추이를 감안하면 앞으로 중국 경제성장률은 좋을 때는 7~8%, 나쁘면 4~5%로 평균 5~6% 선에 머무를 것으로 런쩌핑은 전망했다.

제조업 키워 미국식 내수시장 만든다

연구팀은 성장 속도 저하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경제가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수출·투자·소비가 삼두마차로 성장을 이끌던 데서 소비 중심의 미국식 내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봤다. 이런 전환을 이끌 핵심 전략으로 첨단 제조업 육성과 서비스업 업그레이드 등을 꼽았다.

첨단 제조업 육성과 서비스업 업그레이드는 2015년 12월 중국 공산당 중앙경제공작회의가 결정한 공급 측 구조 개혁의 핵심 내용이다. 시코노믹스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공급 측 구조 개혁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시절의 공급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에서 따온 것이다. 과잉생산 시설 해소를 통해 기업의 집중도와 수익성을 높이고, 이렇게 높아진 수익을 연구 개발에 투자해 제조업 경쟁력을 제고하며, 감세를 통해 민간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한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2012년부터 철강, 석탄, 알루미늄 등을 중심으로 과잉생산 설비를 대거 줄이고 있다. 또 '중국 제조 2025' 전략을 바탕으로 디스플레이와 2차 전지, 항공 등 전략사업을 육성하고 있다.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레이건이 공급경제학을 통해 강력한 미국의 재건에 나섰듯이 시 주석도 제조업 고도화를 통해 인구 보너스가 끝난 중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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