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우리가 몽땅 다 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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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8.04.21 03:00

      발리·랑방·레나운… 해외 명품 브랜드 쓸어담는 중국 부자들

      지난 2월 스위스 명품 브랜드 발리(Bally)의 프레데릭 드 나프(Narp) 최고경영자(CEO)가 홍콩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중국의 섬유 방직 기업 산둥루이(山東如意) 그룹의 추야푸(邱亞夫·위 왼쪽 사진) CEO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산둥루이가 약 7억 달러(약 7500억원·추정)를 내고, 발리의 주식을 사들이는 계약을 체결했다. 산둥루이는 발리의 최대 주주가 되면서 경영권을 갖게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패션업계에는 130년 역사의 프랑스 명품 랑방(Lanvin)도 중국 기업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의약·부동산·철강 부문을 중심으로 기업의 인수합병(M&A)를 진행해온 중국 푸싱(復星) 그룹이 주인공이었다. 푸싱은 약 1억 유로(약 1300억원·추정)로 랑방의 경영권을 손에 넣었다.

      중국 기업이 연이어 세계 명품 업체를 인수하자 세계 패션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추야푸 산둥루이 CEO는 "프랑스 등 유럽이 앞으로 패션을 주도할지는 몰라도, 그 브랜드의 주인은 중국인일 것"이라며 앞으로도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임을 예고했다.

      프랑스·이탈리아·영국·스위스 중심으로 굴러가는 세계 명품 시장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진원지는 중국이다. 2010년대 들어 중국 기업들은 해외 명품 기업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컨설팅업체 맥킨지가 발표한 '2017 중국 명품 업종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명품 시장 규모는 2016년 1조6790억 위안(약 285조원)에서 2025년 2조7000억 위안(약 459조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런데 명품을 사들이는 중국 소비자의 비중은 이보다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중국의 명품족은 세계 전체 명품 소비의 32%를 차지했는데, 2025년이면 그 비율이 44%로 올라간다. 명품 소비에만 연간 1조 위안(약 170조원)을 쓴다.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소비자가 2016년에 명품을 사들인 액수를 모두 합친 것과 같다.

      100년 역사 '레나운' 사들인 산둥루이

      전 세계 명품 두 개 중 하나를 중국 소비자가 사들이는 시대가 가까워지면서, 해외 명품 업체 인수에 나서는 중국 기업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기업은 산둥루이 그룹이다. 산둥루이는 지난 2010년에 100년 역사의 일본 의류기업 레나운(RENOWN)을 40억 엔(약 400억원)에 사들이면서 명품 브랜드 인수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레나운은 일본에만 2500개 이상의 점포와 23개의 의류 브랜드를 산하에 둔 일본 유명 의류업체다. 산둥루이는 2016년에는 프랑스 간판 패션 그룹인 SMCP의 지분 80%를 13억 유로(약 1조7000억원)에 사들였다. SMCP는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서 인기 있는 산드로(Sandro), 마쥬(Maje), 클로디피에르(Claudi Pierlot)를 보유한 회사다. 작년에는 1억1700만 달러(약 1300억원)에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아쿠아스큐텀(Aquascutm)을, 2억8400만 달러(약 3000억원)에 홍콩 남성복 브랜드 트리니티 그룹(Trinity Group)을 손에 넣었다. 지난 2월 발리를 인수한 뒤에도 산둥루이는 영국 패스트패션 브랜드 톱숍(Top Shop)의 모기업 아케이디아그룹과 인수합병 협상을 진행 중이다.

      산둥루이의 인수전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은 최고경영자 추야푸다. 그는 17세이던 1975년 산둥루이의 전신인 한 섬유공장에서 일하다 1997년 공장을 섬유 기업으로 전환해 CEO가 됐다. 수십 년간 섬유업계에서 일한 그는 중국이 제작 기술은 뛰어날지 몰라도, 패션 자체는 유럽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갖게 됐다. 이를 위해 해외 명품 의류업체 인수에 나선 것이다. 그의 이 같은 행보는 조만간 결실을 볼 것으로 보인다. 내년 10월이면 산둥루이가 스스로 처음 개발한 명품 브랜드 '루이(如意)'가 탄생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산둥루이와 인수 경쟁하는 푸싱그룹

      발리·랑방·레나운… 해외 명품 브랜드 쓸어담는 중국 부자들
      산둥루이만이 아니다. 중국 최대 민영기업인 푸싱그룹도 수천억원을 뿌리며 명품 브랜드 인수에 뛰어들었다. 푸싱그룹은 궈광창(郭廣昌·위 오른쪽 사진) 창업자의 지휘 아래 지난 2013년 이탈리아 맞춤 정장 카루소(Caruso) 인수를 시작으로 독일 브랜드 톰 테일러(Tom Tailor), 프랑스 럭셔리 리조트 클럽 매드(Club Med) 등을 차례로 사들였다. 푸싱그룹도 산둥루이와 마찬가지로 발리 인수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산둥루이에 패하자, 곧바로 다른 먹잇감 찾기에 나섰다. 그 결과물이 바로 랑방 인수다.

      푸싱그룹을 이끄는 궈광창 창업자는 '중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린다. 원래 보험회사를 시작으로 출발한 푸싱그룹은 2013년부터 관련성이 떨어지는 관광과 소비 업계 등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보기엔 무질서해 보이지만 정신없이 투자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투자에 두 가지 원칙을 세워놓았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성장 단계를 고려해 유망 산업을 선별하고, 중국인의 생활방식을 고려해 투자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명품 브랜드 인수도 중국인의 높아진 소비 수준과 소비 문화를 감안한 투자인 셈이다.

      이 밖에도 중국 남성 의류 브랜드 치피랑(七匹狼)은 지난해 독일 유명 패션디자이너 칼 라거펠트(Lagerfeld)가 중국에 세운 '칼라거펠트 차이나' 지분 80%를 4800만 달러에 인수하는 등 다른 기업들도 해외 명품 브랜드 인수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중국인 고객 잡기 위한 우회 전략

      중국 기업들이 해외 명품 브랜드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인들의 서구 브랜드 선호 경향 때문이다. 급격히 늘어나는 중국 소비족들이 중국 브랜드보다 서구 브랜드를 찾다 보니 중국 기업들이 중국인 고객을 잡기 위해서 해외 브랜드 인수에 나서는 측면이 있다.

      사실 중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명품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기술을 갖고 있다. 산둥루이의 경우 현재 중국에만 13개의 섬유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파리와 밀라노 등에는 연구·개발(R&D) 센터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 최고 명품 브랜드인 루이뷔통이나 에르메스 등은 산둥루이가 디자인하고 생산한 섬유 원단을 사용한다. 심지어 명품 업체들이 보유한 극비 제조 기술을 입수하기 위해 서구 명품 공방들을 통째로 인수하면서 상당히 많은 원천 제작 기술을 확보한 상태이다.

      하지만 중국 고유의 명품 브랜드가 개발돼 이름을 떨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중국 소비자들이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맥킨지에 따르면 중국 소비자들은 명품을 구매할 때 가장 먼저 브랜드 인지도를 고려하고 있다. 디자인이나 제품의 질은 그다음 고려 사항이다. 그래서 중국의 명품 쇼핑족 상당수는 해외나 면세점에서 명품을 사들인다. 중국 명품업체의 입장에서는 급증하는 중국 명품 소비자들을 잡기 위해서라도 해외 브랜드를 인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자체 명품 브랜드 육성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국 고유의 명품을 알리고 판매해줄 지원군이 하나둘씩 등장하고 있다. 중국 거대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는 지난 2월에 열린 뉴욕 패션위크에서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와 함께 '티몰 차이나 데이'를 주최했다. 티몰은 알리바바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티몰 명품패션부 총괄자 류슈윈(劉秀雲)은 행사장에 올라 피스버드, 첸펭, 리닝, CLOT 등 네 개의 중국 패션 브랜드를 소개했다. 그는 "티몰의 목표는 중국만의 디자인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해외에 꽂힌 중국 명품 소비자들의 시선이 국내로 돌아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