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떠받치듯, 탄탄한 저변의 중소기업들… 세계 100년 기업의 80%가 日 열도에

입력 2018.04.21 03:00

[Cover story] 일본 강소기업의 비결, 전문가 입체 분석

/이우광 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일본 산업계 지형을 거론할 때 경쟁력 있는 탄탄한 중소기업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가 자주 강조된다. 대기업 중심인 한국과는 반대라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일본은 중소기업 저변이 넓은 '후지산형'이고, 한국은 대기업 중심인 '역피라미드형'이란 비유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선 많이 퍼져 있다. 도요타·파나소닉 같은 일본 대기업들도 소재·부품을 만드는 탄탄한 중소기업이 포진해 있기 때문에 세계시장을 제패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일본 대기업은 부품을 사내에서 생산하는 내재율이 낮다. 미국 완성차 업체는 부품의 70% 정도를 내부에서 생산하지만, 일본은 30% 정도에 불과하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의존하는 정도가 깊다. 그만큼 일본엔 기술력과 제품력이 뛰어난 중소기업이 많다는 얘기다.

일본 경제산업성 자료를 보면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일본 중소기업 수는 100개가 넘고, 세계 톱 수준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을 합치면 그 규모는 1000개를 웃돈다. 이들이 일본 산업을 떠받치고 있다. 기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애플 스마트폰도 제조 비용의 30%를 일본 부품 기업이 가져간다. 글로벌 기업들 중 일본 중소기업 부품을 받아가지 않는 곳이 드물고 이는 한국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창업 300년 기업 605개, 1000년 넘은 기업 7개

일본 중소기업들은 장수 기업이 많다. 기업 수명 30년설이 회자되는 가운데 그 10배인 창업 300년 기업이 605개나 존재한다. 500년 이상 39개, 1000년 이상도 7개나 있다. 100년 이상 된 기업은 2만개가 넘으며 전 세계 100년 기업의 약 80%가 일본에 있다. '장수 기업 대국 일본'이라 부를 만하다. 장류, 주류, 과자류 등 생필품에서 차, 종교 관련 도구, 여관 등 전통문화 관련 산업에 많다. 주물, 단조 등 장인 기술이나 정신을 계승해가는 가족 기업도 많다. 아마 이런 중소기업들이 일본 강소기업의 뿌리다.

일본에 장수 기업이 많은 배경으로 섬나라, 농경민족, 전쟁이 적었던 역사 등 지정학적·문화적 이유를 자주 들지만, 그보다는 일본인들 기업관이 좀 남다른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인은 비즈니스를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적 의의를 더 중시하며 자기실현, 자기 충족의 장으로 생각한다. 또 기업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계승해야 할 가업으로 인식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경영을 한다. 이런 비즈니스관, 기업관이 기업을 장수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일본에서 장수 기업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이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 기술이나 정신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기술과 제품도 변화시켜나가는 탁월한 환경 적응력 때문이다. 그래서 대기업들도 중소 장수 기업으로부터 환경 변화 적응력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심각해지는 중소기업 문제

일본에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하도급 관계는 일반적이다. '하청(下請·시타우케)'이란 말도 일본에서 나왔다. 전시 경제하에서 물자를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정책적으로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전후에도 하도급 제도는 지속됐다.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 경제에서 수요가 왕성하자 대기업은 생산 물량 확보를 위해 중소기업에 정보·인력·자금을 제공하면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글로벌 경제가 진전되면서 국내 수요는 정체했고, 대기업은 비용 삭감을 위해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국내 생산을 지속하더라도 글로벌 아웃소싱을 활용했다. 그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거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중소기업 존립 기반도 약화됐다. 최근에는 사업 승계난, 인재 부족난 등 경영난에 직면하고 있으며, 승계난으로 흑자 도산도 벌어지고 있다. 일본 중소기업 수는 1986년 87만개를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창업은 드물다.

교토 기업을 모델로 강소기업 지향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지금 일본 중소기업은 강소기업을 지향하며 독자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교토 출신 기업들은 모범 사례다. 교세라, 일본전산, 무라타, 옴론 등 교토 출신 부품 기업들은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독자적인 기술력과 제품력으로 일본 시장보다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여 성공했다. 대기업과 관계를 중시하는 기존 일본적 경영 방식과는 다른 점이다. 기존엔 n개 중소기업이 1개 대기업에 납품하는 거래 방식이었다면, 글로벌 아웃소싱 시대에는 n개 중소기업이 n개 대기업과 자유롭게 거래하고 있으며, 기술력·제품력을 갖춘 '온리 원(only one)' 중소기업은 1개사가 n개 대기업과 거래하는 시대로 변했다. 교토 기업들이 그들이다.

글로벌 강소기업의 9가지 조건

일본의 중소기업 가운데 글로벌 강소기업이 되는 회사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독자적인 기술과 제품 개발력을 보유하고 있다. 단지 기술력이 뛰어난 것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제품을 구상하는 능력, 즉 설계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자사 브랜드의 제품과 기술을 보유함으로써 하도급으로부터 독립이 가능했다.

둘째, 사업 분야의 선택과 집중이다. 언제 자신의 사업 분야가 따라잡힐지 모르는 상황에서 향후 자신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잘 선별하여 한정된 자원을 투입하고 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기며 무엇을 새로 만들 것인가를 선택하고 도전하는 기업들이다.

셋째, 고객 요구는 해결하기에 다소 난관이 있더라도 거절하지 않고 도전한다. 아프지 않은 주삿바늘을 개발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오카노공업은 대부분 기업이 이런 주문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했지만, 거절하지 않고 개발에 착수해 성공을 거뒀다. 새로운 과제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가 기술 향상, 인재 육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넷째, 고객의 니즈를 중시한다. 고객의 니즈를 철저하게 듣고 이를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로 삼는다. 고객의 작은 목소리를 틈새시장 확보의 기회로 활용한다.

다섯째, 회사가 보유한 주요 기술이 반드시 첨단 기술은 아니다. 제조 현장에서는 로테크 기반 기술이 있어야 하이테크 기술 도입도 가능하다.

여섯째, 자사 기술이나 제품을 시장에 어필하는 능력이 있다. 제품이 우수하면 중소기업이라도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

일곱째, 개발에서 설계·제조까지 기술자 1명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설계도를 그린 사람이 스스로 시제품도 만든다. 다능공이기 때문에 사업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파악할 수 있어 아이디어를 내거나 유연한 대응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여덟째, 인재 육성에 열심이면서 현장에서 공을 들여 천천히 인재를 육성해 나간다.

아홉째, 외부 네트워크를 잘 활용한다. 일본엔 도쿄의 오타구, 오사카의 사카이시 등 중소기업 집적지가 많다. 중소기업들이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주문이라도 서로 협력하여 대응한다. 역할 분담으로 자사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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