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물업체에서 최고 밥솥 제조업체로… 하도급 굴레 벗고 직접 제품 판매

입력 2018.04.21 03:00

[Cover story] 일본 강소기업의 불타는 생존력… 대표 기업 3곳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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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물을 안 넣고도 요리가 가능한 주물냄비 ‘버미큘라’ (사진 오른쪽)1도 단위로 섬세한 불 조절이 가능한 ‘버미큘라 밥솥’. /아이치도비
일본 나고야 인근에 위치한 주방용품 기업 아이치도비(愛知ドビ―) 본사. 출입문 옆 창가에는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라 적힌 큰 간판이 걸려 있다. 간판 밑으로 알록달록한 색상의 냄비 3개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 공장에서는 쇠막대기로 철을 내리치는 듯한 굉음이 자주 들렸다. 창가에 전시된 밝은 색상 냄비는 일본에서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린 '버미큘라'. 가격은 1~2인용이 22만원, 4인용이 28만원이다. 비싼 가격에도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4월에 주문해도 5월 말에야 받을 수 있다. 냄비에 이름을 새기는 추가 서비스까지 신청하면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 버미큘라는 2010년 출시 이후 30만 개 넘게 팔렸다. 주방용품 업계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아이치도비는 매출이 2010년 4억8200만엔에서 지난해 44억5500만엔(약 444억6100만원)으로 10배 뛰었다.

그런데 아이치도비는 원래 금속을 녹여 산업용 기기 부품을 만들던 주물 전문 회사였다. 실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대기업에 의존하는 하도급 기업 특성상 기복이 심했다. 주문이 갑자기 감소한 2001년엔 채무 가 채권을 초과하는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히지가타 구니히로 대표이사는 하도급 기업에 머무르면 크게 성장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기존 역량 활용한 신제품 개발

문제는 신규 사업에 투자할 만한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 이 때문에 구니히로 대표와 동생 도모하루 부사장은 아이치도비 고유 기술을 활용해 만들 수 있는 제품군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아이치도비가 가진 기술은 무쇠를 녹여 틀을 만드는 '주조공정 기술'과 주조로 완성된 철의 주물을 정밀하게 깎아내는 '정밀가공 기술'. 히지가타 형제는 이 기술들이 조리 도구, 특히 냄비를 만드는 데 장점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 '르크루제' 등 유럽 명품 주물 냄비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도 깨달았다. 이후 형제는 해외 주요 주물냄비 제품을 사들여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주물 냄비의 장점은 열이 고르게 퍼져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요리를 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기존 주물 냄비 제품 대다수는 뚜껑과 본체가 제대로 밀착되지 않아 재료에서 우러나오는 수분을 유지하지 못했다. 구니히로 대표는 이 틈새를 공략했다. 밀폐가 잘되면서 식재료 본연의 맛을 끌어내고, 열로 인한 영양소 손실은 최소화하는 주물 냄비를 만들면 승부를 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독자적 신기술 개발에 전력투구

하지만 개발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6개월이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주물 냄비 개발은 3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아이치도비는 두가지 신기술을 개발했다. 하나는 냄비 뚜껑을 닫았을 때 열이 새나갈 수 있는 틈새를 100분의 1㎜ 이하로 줄이는 밀폐 기술. 1년 반 연구 끝에 주요 프랑스 경쟁사보다 밀폐성을 10배 가까이 높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다음은 주물에 법랑(琺瑯·에나멜)을 코팅하는 기술. 에나멜은 섭씨 800도에서 연소하는데 주물은 720도가 넘어가면 성질이 변한다. 주물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법랑을 굽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도 1년 반이 또 걸렸다. 구니히로 대표는 "이전까지 극소수 프랑스 기업만 보유했던 기술로, 일본에서는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버미큘라 냄비다. 그는 "주조공정, 법랑공정, 정밀가공 3개 기술을 다 갖춘 기업은 아이치도비밖에 없다"면서 "100년 후에도 냄비 안쪽에 새겨진 '메이드 인 재팬' 로고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요리 애호가 입소문에 고급 브랜드로

성능이 뛰어난 냄비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초기엔 인지도가 부족해 애를 먹었다. 그러나 이는 시간문제. 요리사나 블로그, 소셜미디어를 운영하는 요리업계 인플루언서(influencer) 등에게 버미큘라 냄비를 무료로 제공한 뒤 평을 부탁하자, 이를 접해본 요리인들이 품질을 높게 평가하면서 입소문을 타고 인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제품이 방송에 소개되자 주문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2010년 평균 50개였던 월 생산량은 오늘날 1만2000개로 늘었다.

현재 아이치도비는 제품 품질·가격에 걸맞은 고급 브랜드로 입지를 다지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선보이고 있다. 유럽에서 주물 냄비 전용 요리책이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을 참고해 버미큘라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조리법을 담은 요리책도 내놓았다. 최근엔 유기농 소재로 만든 냄비 받침대, 앞치마 등 주방용품으로 제품군을 확장했다. 구니히로 대표는 "냄비와 밥솥을 만드는 단순 제조기업이 아니라 (요리 관련 문화를 판매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거듭나고자 한다"고 말했다.

히지가타 구니히로 대표/아이치도비
"주문 물량에 좌우되던 70년 하도급업체… '세계 최고 냄비 만들자' 새 목표에 도전"

대기업 주문을 받아 부품을 만드는 하도급 기업은 수많은 외부 변수 영향을 받는다. 기술이 뛰어나도 경기가 나쁘면 일감이 줄기도 하고, 경쟁자가 많아지면 단가를 낮추거나 거래처를 잃는 상황에 처한다. 70여 년간 선박·건설기계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하도급 기업 아이치도비는 냄비와 밥솥을 만들어 파는 소비재 기업으로 변신하는 방법을 택했다.

히지가타 구니히로(土方邦裕·44·사진) 대표는 1997년 도쿄이과대를 졸업한 뒤 도요타통상에서 일하다가 2001년 가족이 운영하는 아이치도비에 입사했다. 그는 “주조 업체인 아이치도비를 좋은 하도급 기업으로 키우는 게 원래 목표였다”면서 “먼저 주조 기술부터 익혀야겠다고 마음먹고 IS9100이라는 기술 자격증을 땄다”고 말했다. 직접 주조 기술을 익혀 공장에서 일해본 그는 다른 기업에 납품할 제품을 만드는 하도급 업체로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소비재 기업으로 변신이 가능했던 이유는 기존 사업과 무관한 분야에 뛰어들지 않고 아이치도비의 강점인 주조 기술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구니히로 대표는 “완전히 새로운 기술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주조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제품을 물색했다”면서 “버미큘라 개발을 시작했을 때 직원도, 기술도, 사용하는 기계도 같았고 만드는 제품만 주물 냄비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주방처럼 꾸며진 아이치도비 본사 2층에서 만난 그는 버미큘라 냄비의 뚜껑을 들었다 내리는 등 시범을 보이면서 “냄비나 밥솥을 만드는 주방용품 업체는 많지만, 버미큘라는 기존 제품의 단점을 보완한 제품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했다”고 설명했다. 구니히로 대표는 중소기업이 변화에 대응하려면 “리더가 현장에서 발로 뛰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이치도비 공장에서 주조 공정을 해본 이후 제조 기업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현장 경험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는 설명이다.

아이치도비는 소비재 기업으로 변신한 뒤엔 소비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2016년 말 출시 이후 15개월 치 주문이 밀리는 등 돌풍을 일으킨 ‘버미큘라 라이스팟(밥솥)’도 “아이치도비 주물 냄비로 밥을 지으면 더 맛있다”는 소비자 의견을 반영해 개발했다.

●아이치도비

설립 1936년
본사 일본 나고야
대표이사 히지가타 구니히로
직원 240명
사업 내용 주물 냄비·밥솥 등 제조
매출 44억5500만엔(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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