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견훤 포용한 '환대 경영' 징기즈칸보다 350년 더 지속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입력 2018.03.24 03:07

[장대성의 제왕경제학] (4) 왕건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王建)은 글로벌 휴머니즘 정신을 소유한 제왕이었다. 부드러운 성품이면서 인내심도 강해 목표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무에 탁월하고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지만 겸손했다. 적을 죽이는 것보다 정성을 다해 환대(歡待)하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휴머니스트 기질이 다분했던 셈이다.

반면 칭기즈칸은 군사작전에 비범한 천재로 왕건보다 300년 뒤 몽골 대제국을 건설했다. 조직의 구성·관리에 천재적인 자질이 있었지만, 성품이 무자비해 이복형을 비롯해 자기를 도운 사람을 권력을 위해서 죽였다. 권력욕에 탐닉, 여러 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사람을 살육한 잔인한 정복자였다.

평민 호족의 아들

왕건은 통일신라 말기 877년 송악(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름은 용륭(龍隆)으로 용이 일어난다는 뜻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작제건(作帝建), 제왕을 일으켜 만든다는 뜻이다. 성(姓)이 없어 귀족층은 아니고 평민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감히 왕건의 이름을 왕이 된다는 뜻으로 지은 걸 보면 세력과 재력이 대단했던 호족임을 알 수 있다. 왕건의 왕도 처음에는 성이 아니었고 '왕건'이란 이름을 뜻했다. 왕건 조부와 부친은 고구려 유민 후손으로 개성에 와서 해상 무역을 하여 큰 재산을 번 재력가였다고 한다. 왕건 부친 용륭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혼탁한 신라 말기에 감히 아들을 후삼국을 통일할 제왕이 될 것이라고 이름을 왕건(王建)으로 짓고 최고의 문무 교육을 시켰다.

왕건 일러스트
일러스트=조나연
휴머니즘으로 제왕 등극

왕건은 어려서부터 제왕의 자질 교육을 받았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도량이 넓어 어려서부터 아랫사람 실수나 잘못에도 관대했으며 심지어는 포로가 된 적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20세에 집안을 살리기 위해 신라 왕족 출신으로 후고구려를 893년에 세운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서 궁예에게 충성을 다하여 2인자 위치인 시중까지 올라갔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하며 민중을 구제한다고 일어섰지만, 장인 양길을 죽이고 부인과 아들도 죽일 정도로 포악했다.

궁예는 의심이 매우 많았다. 소위 '관심법(觀心法)'으로 다른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때로는 거짓말한다고 죽였다. 왕건도 관심법에 걸려 죽을 위기를 겪었으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포악한 궁예 밑에서 왕건은 묵묵히 참고 견뎠다. 22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의심과 변덕 덩어리인 궁예 마음을 달래면서 끝까지 신뢰를 잃지 않았다. 이런 휴머니즘과 인내력을 높이 평가한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고려 4대 개국공신) 등이 궁예를 죽이고 918년 왕건을 고려 초대 왕으로 추대했다.

망한 신라 경순왕을 환대

신라는 846년 해상 세력 장보고가 죽은 이후 지속적인 부패와 지방 호족 발호로 통제력을 상실했다. 900년 후백제, 918년 고려가 건국되면서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군사력이 강했던 후백제는 927년 신라 수도 경주를 공격하고 신라 55대 경애왕을 살해했다. 견훤은 김부를 신라 왕으로 세웠다. 56대 경순왕이다. 신라는 이미 국가로서 존립 자체가 어려웠다. 왕건이 신라를 공격하면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적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망해가는 신라를 공격하지 않고 대신 후백제를 적으로 돌렸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견훤에게 살해당하자 왕건은 신라를 도우러 출전했다가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 부대에 포위되어 죽을 위기에 빠졌다. 그때 충복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가짜 왕건이 되었고 왕건은 다른 옷을 입고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살아났다. 신숭겸은 장렬히 전사했다. 왕건은 위험을 안으면서까지 신라를 포용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후백제는 군사력은 강했지만, 역사가 없는 신생 국가였다. 반면 신라는 지는 국가였지만 1000년 역사를 가진 왕국이었고 후백제가 갖지 못한 찬란한 전통문화가 있었다. 강한 호족에 인구도 많았다.

신라인들은 자기들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한 견훤은 경계했지만 왕건에게는 마음을 열어줬다. 견훤에게 압박과 협박을 당하던 경순왕은 왕건의 환대에 감동하여 신라를 맡겼다. 935년 경순왕이 문무백관을 데리고 고려 수도 송경으로 향하자 왕건은 교외로 나아가 경순왕을 정중히 맞았다. 장녀 낙랑공주를 시집보내 경순왕을 사위로 삼았다. 또 경순왕을 위국 공신 낙랑왕으로 봉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제공했다.

경애왕 죽이고 왕비 범한 견훤도 우대
개성에 있는 왕건릉
개성에 있는 왕건릉
왕건은 무예에 탁월했고 학식도 상당했다. 통일을 위해 세력 있는 호족들을 포용하는 결혼 정책으로 부인 29명을 맞이했으나 부인끼리 싸움을 하거나 크게 충돌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런 성품은 최대의 적이었던 후백제 견훤 왕까지 정성과 환대로 끌어안아 자기편으로 만든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견훤은 용맹이 뛰어난 무장 출신으로 카리스마가 대단했고 군사작전에 비범했다. 그러나 교만하고 잔인한 면도 있어 신라를 침략하여 55대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범했다. 신라 백성으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견훤을 멀리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견훤은 장자 신검보다 후처에게서 얻은 금강을 더 예뻐해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쫓아냈다. 견산사(전북 김제)에 유폐당했던 견훤은 탈출해 왕건에게 도움을 청했다. 얼마 전만 해도 원수였는데 이제는 두 날개 다 떨어진 독수리. 왕건은 견훤을 친아버지처럼 극진히 환대했다. 고려 백관들보다 높은 지위에 두고 금과 비단, 노비 40명 등을 예물로 줬다. 70세 노인 견훤은 이런 환대에 감동, 눈물을 흘렸다. 936년 견훤은 왕건이 신검 군대를 공격할 때 최선을 다해 도와 아들 신검이 항복하게 한 후 곧 죽었다. 신검의 항복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신검도 포용하여 벼슬까지 주었다.

환대 경영으로 평화 통일

왕건은 신라 경순왕을 겁박하는 대신 환대를 베풀어 고려에 투항하도록 했다. 장녀를 주어 사위로도 삼았다. 후백제 견훤은 장남에게 배신을 당해 분노에 차 있었는데 왕건의 환대를 받자 후백제의 모든 정보와 상황을 왕건이 최대한 활용하게 도왔다. 그 결과 왕건이 후백제 신검 군대를 쉽게 궤멸시켜 통일 사업 완수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후삼국 통일은 이런 식으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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