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후폭풍… 글로벌 기업들 영국서 속속 방 뺀다

입력 2018.03.24 03:07

"굿바이, 런던", "떠나지 마오"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스프레드인 마마이트
"마마이트(Marmite) 제조사 유니레버는 왜 런던 본사를 버리는가." "유니레버가 영국 대신 네덜란드를 선택해 메이(총리)에게 한 방을 날렸다." 영국·네덜란드 합작 기업인 유니레버가 두 나라에서 동시에 운영하던 유럽 본사를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일원화하겠다고 지난 14일 발표하자 영국 언론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유니레버는 매출 기준으로 세계 5위 소비재 대기업이자,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스프레드(빵·과자 등에 발라 먹는 제품)인 마마이트를 제조한다. 이 유니레버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파로 영국 본사를 버린다는 소식에 영국인들은 허탈한 기색이다. 유니레버는 브렉시트가 이번 결정의 핵심 요인은 아니며, 미용·가정용품 사업부는 런던에 남기겠다고 영국 국민에게 해명했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기업 이탈을 막고 투자 유치에 안간힘을 다하는 영국 정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금융 중심지인 런던에서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던 '브렉시트 엑소더스(대탈출)'가 다른 산업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영국과 EU(유럽연합)는 브렉시트 절차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상대 측 시민권자의 거주권을 보장하는 등 앞으로 21개월에 걸쳐 영국을 EU에서 분리하는 절차를 온건하게 진행하기로 지난 19일 합의했다. 그러나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자 비(非)유럽계 기업의 유럽 진출 창구로 군림하던 런던의 지위는 이미 흔들리고 있다. 다국적기업들이 영국 탈출 대열에 합류할 것이란 우려도 여전하다. 그동안 유럽 단일시장 가입 덕택에 누리던 관세 면제나 공통 법규 적용 등 다양한 EU 회원국 혜택들이 대거 사라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건스탠리·도이체방크 4000명 빼내


브렉시트 결정은 이미 영국 실물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EU 탈퇴가 결정된 2016년 국민투표일(6월 23일) 이후 1년간 하향 곡선을 그려, 지난해 8월 말 미국 달러화와 유로화 대비 각각 20%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하락한 파운드화 가치는 지난해부터 영국 소비자 물가에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원자재 등 수입품 가격이 오른 탓이다. 1%를 밑돌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 선에 육박했다.

브렉시트 결정 이후 실제로 영국을 떠나는 움직임이 가장 먼저 포착된 산업은 금융계다. 런던에 유럽 본사를 둔 세계 각국의 상업·투자은행과 증권사 등이 속속 인력 감축과 본사 이전 계획을 발표한 상태다. 한때 런던과 함께 유럽의 양대 금융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 유럽중앙은행(ECB)이 자리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금융산업 역사가 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정부 차원에서 금융업 육성에 적극적인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이 런던을 대체할 후보들로 꼽힌다.

당장 미국계 모건스탠리는 영국 내 전체 직원의 25%에 해당하는 4000명을, 독일 도이체방크는 영국 내 인력 9000명 중 절반을 프랑크푸르트로 이동시킬 예정이다. 미국 금융사인 골드만삭스와 영국 시티그룹, 일본 노무라은행, 스위스 UBS 등도 프랑크푸르트 지사 기능을 강화하거나 법인으로 확대해 유럽 본사 역할을 맡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소시에테제너럴과 미국 BoA메릴린치는 파리로 각각 직원 300~400명을 이동시킬 예정이다. 일본 미쓰비시UFJ증권은 런던 본사를 네덜란드로 이전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법인을 설립하고 금융업 인가를 신청하기로 결정했고, 영국 바클레이스는 더블린 지사를 키울 방침이다. 영국 주식시장의 핵심 지수 중 하나인 FTSE100에 편입된 금융 대기업 스탠다드차타드의 경우, 투자자들이 유럽 본사를 이전하는 방안을 고려하라고 경영진을 압박할 정도다.

영국 금융사인 HSBC와 스위스 금융사인 크레디스위스는 브렉시트로 영국이 유럽의 '금융 패스포트'를 잃을 경우, 유입 자산 규모가 줄면서 영국 법인 매출이 20% 안팎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 '금융 패스포트'란 금융회사가 EU의 한 회원국에서 인허가를 받으면 다른 모든 회원국에서 별도의 허가 없이 영업할 수 있는 회원국 특혜를 말한다. 지난해 말 런던 소재 EU 기구인 유럽은행감독청(EBA)과 유럽의약청(EMA)이 각각 프랑스 파리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전하기로 확정하면서 금융회사의 불안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 같은 금융사 탈출 러시가 문제인 이유는 금융업이 영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영국 하원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은 금융업에 대한 부가가치 창출 의존도가 룩셈부르크, 스위스, 네덜란드 등에 이어 세계에서 여섯째로 높은 나라다. 2016년 기준 영국의 총부가가치(GVA)에서 은행·보험업 비중은 7.2%이고, 이 중 50%가 런던에 집중돼 있다. 금융업계 종사자 수는 약 110만명이다. 영국 전체 일자리의 3.1%에 해당하는 숫자다. 2016년 금융 서비스 수출액은 555억파운드(약 83조원)를 기록했다. 특히 지난 10년간 금융업은 매년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3% 안팎의 무역흑자를 낸 업종이다. 그러다 보니 브렉시트 여파로 금융업에서만 1만~2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FTA·투자 유치 위해 뛰는 메이 총리

지난해 3월부터 EU 탈퇴 절차를 논의 중인 영국 정부는 유럽 시장을 대체할 무역 창구를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EU 국가들은 영국 전체 수출의 약 40%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무역 상대지만, 브렉시트 이후에는 영국이 지금과 똑같은 무관세나 규제 면제 혜택을 누리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구매·조달 분야 조사기관인 차터드인스티튜트에 따르면, EU 국적 기업 중 42%는 브렉시트 이후에는 영국 기업을 협력사로 선택할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답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각국 정상과 기업인들을 만나며 숨 가쁘게 움직이는 중이다. 올 1월 중국을 방문한 메이 총리는 "중국은 우리(영국)가 무역 협정을 맺고 싶은 나라"라며 "영국 기업들은 중국의 좋은 무역 상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에는 닛산, 미쓰비시, 파나소닉, 혼다 등 일본 기업인들을 런던 집무실에서 만나 "앞으로 다가올 영국의 EU 탈퇴가 작은 일은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고 있다"면서도 "이는 이미 굳건한 관계인 영국과 일본이 무역 협정 등을 추진할 기회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유럽 사업에 이익이 되지 않으면 영국을 떠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일본 자동차업계는 브렉시트로 대(對)유럽 수출에 타격을 입을 것이란 우려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영국산 제품에 최대 10% 수출 관세가 부과되거나 통관 절차가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과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이어온 영연방 국가들은 무역 협정을 새로 체결하는 등 후속 과정을 진행하는 데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영국이 호주와 뉴질랜드를 협상 우선순위에 올려놓자, 호주는 일찌감치 새로운 무역 협정 체결에 호의적인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메이 총리를 만난 맬컴 턴불 호주 총리가 브렉시트 이후 가능한 한 빨리 새 협정을 맺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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