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로 만든 옷 입고 파인애플로 만든 가방 들고 포도로 만든 신발 신고

입력 2018.03.10 03:06

비건 패션

인조가죽·인조모피 명품업체들 눈돌려
기술 발전하며 동물 소재 뺨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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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Q밀히 미살균 우유를 살균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카제인(단백질의 일종)이 주재료인 옷감으로 만든 원피스. 질감이 부드럽고 보온성이 좋아 등산복 안감으로도 쓰인다. ② 아나나스 아남 파인애플 가죽 ‘피냐텍스’로 만든 핸드백. 필리핀 농가에서 파인애플 수확 후 버려지는 잎을 모아 섬유소를 추출한 뒤 가공하면 동물 가죽 못지않게 질기고 튼튼한 원단이 된다. ③ 비제아 ‘와인 가죽’으로 만든 남성용 구두. 이탈리아 와인 양조장에서 와인을 만든 뒤 버리는 부산물에서 섬유질과 기름을 추출한 뒤 가공해 만든 내구성 좋은 가죽이다. ④ 오렌지파이버 오렌지 주스 등을 만든 뒤 버려지는 오렌지 껍질과 부산물 속에서 섬유소를 추출해 만든 섬유.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페라가모가 이 섬유로 만든 원단을 사용해 스카프 등을 선보였다. ⑤ GZE 아열대성 기후에서 자라는 버섯갓 부분의 겉껍질을 벗겨 내 만든 ‘무스킨’ 원단의 핸드백. 겉면에 약간의 보풀이 있고 부드러워 스웨이드 가죽 대체재로 주목받고 있다. ⑥ 볼트트레즈 유명 패션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가 인공 거미줄 섬유인 ‘마이크로실크’로 만든 드레스. 거미의 DNA를 복제·변형해 효모에 심어 거미줄과 똑같은 성분의 단백질 실을 뽑아내 만들었다. ⑦,⑧ 모던메도 모던메도는 동물 가죽과 같은 성분의 콜라겐을 생성하는 인공세포를 만들어 가죽을 ‘배양’하는 기업이다. 사진 7은 실험실에서 자라고 있는 인공가죽이고, 사진 8은 이 가죽 원단을 덧댄 면 셔츠. ⑨ 마이코워크스 미아코워크스는 버섯 뿌리에 해당하는 균사체를 다양한 온도와 습도에서 키워 내구성을 조절, 버섯 가죽부터 벽돌까지 다양한 버섯 원자재를 생산한다. 사진은 마이코워크스가 만든 버섯 가죽/각 회사 제공
'오렌지 껍질, 파인애플 잎사귀, 우유·와인 찌꺼기, 버섯 뿌리….'

음식물 쓰레기통에 가면 볼 수 있는 오물들이 요즘 패션 업계에서는 최고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는다. 명품 가방과 스카프 등의 주재료였던 가죽과 실크를 대신할 구원투수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오물들이 명품 소재가 됐을까? 조르지오 아르마니, 구찌 등 해외 유명 명품 제작 업체들까지 동물 보호에 동참하겠다고 나선 까닭이다.

오랜 기간 희귀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멋'을 선도해온 명품 업체들은 최근 몇 년 사이 거세진 동물 애호가들의 비난 여론에 시달렸다. 잔혹하게 희생되는 동물들의 실태가 알려지고 실제 동물 털·가죽보다 '가짜'를 선호하는 소비자가 늘었다. 그러자 명품 업체들도 하나둘 동물 가죽과 털·실크 등을 사용하지 않는 '비건 패션(vegan fashion)'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눈 돌린 분야가 인조 가죽·인조 모피와 같은 '대안 원단(alternative fabrics)' 시장이다. 화학물질로 만들어진 대안 원단이 동물 털이나 가죽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첨단 공법과 생체공학기술까지 더해지면서 동물 소재 못지않은 기능과 기발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우유는 등산복에, 파인애플은 핸드백에

지난 1월 열린 독일 베를린 패션위크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인 '그린쇼룸'에서는 등산복과 백팩 한 세트가 눈길을 끌었다. 독일 아웃도어 업체 브랜드 바우데(Voude)가 제작한 이 상품은 우유 부산물을 활용해 만든 제품이다. 등산복과 배낭의 안감에 사용된 부드럽고 보온성 좋은 원단이 우유 부산물에서 나왔다. 원단은 독일 스타트업 업체 'Q밀히(Q-Milch)'가 먹지 못하는 우유 부산물에서 단백질 성분을 분리·가공해 제작한다. 독일에서 매년 200만t씩 버려지는 미살균 우유가 그야말로 재탄생하는 셈이다. 이 업체는 이런 미살균 우유를 활용해 의류용 원단 외에 화장지도 생산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이처럼 친환경·동물 친화적 소재를 활용한 의류와 잡화가 전시되는 박람회가 열렸다. 스페인 패션 브랜드 마라빌라스(Maravillas)가 선보인 백팩과 핸드백은 '파인애플 가죽'으로 만들었다. 원단은 영국 업체 아나나스 아남(Annanas Anam)이 개발한 '피냐텍스(Pinatex)'다. 파인애플 가죽은 파인애플의 잎사귀를 모아 섬유질을 뽑아내고, 고무 성분을 제거한 뒤 숙성시키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섬유질은 부드러워지고 공기가 잘 통하게 되는데, 섬유질을 모아 펠트처럼 찍어내고 무두질하면 바느질을 견뎌낼 만큼 단단해진다. 무두질은 불필요한 성분을 제거하고 약품을 흡수시켜 사용하기 편리한 상태로 만드는 작업 과정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가죽 대체재인 피냐텍스가 탄생하게 된다. LVMH그룹 산하의 패션 브랜드 이던(Edun), 스포츠웨어 브랜드 푸마(PUMA) 등 유명 브랜드도 피냐텍스로 만든 상품을 판매한다. 피냐텍스는 동물성 가죽보다 방수 기능이 좋고 가격도 저렴해 패션 업계 밖에서도 러브콜을 받는다.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Tesla)의 자동차 시트 가죽이 피냐텍스로 만들어진다.

포도·오렌지 부산물도 패션 재료

패션 강국 이탈리아에서는 과일을 활용한 대안 원단 실험이 한창이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명물로 꼽히는 오렌지는 하늘하늘한 스카프 원단으로 재탄생했다. 이탈리아 특산물을 활용한 독특한 원단 개발을 고민하던 패션학도 아드리아나 산타노치토와 엔리코 아레나가 시칠리아에서 매년 연 7억t가량의 오렌지 부산물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원단 개발에 나선 것이다. 오렌지 껍질과 부산물에서 섬유소를 추출하고 가공하는 등의 실험을 한 끝에 2014년 '오렌지파이버'의 첫 시제품이 탄생했다. 지금은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단계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페라가모는 지난해 이 원단으로 만든 스카프를 '오렌지파이버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출시해 판매에 들어갔다.

밀라노에 있는 패션 브랜드 비제아(Vegea)가 판매하는 가죽 핸드백은 언뜻 보면 내구성 좋은 소가죽 핸드백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단단해 보이고, 각이 잘 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핸드백의 주요 소재는 포도다. 포도로 와인을 만든 뒤 와이너리(포도주를 만드는 양조장)에서 매년 태워 없애는 포도 찌꺼기를 눌러 붙인다. 그다음 섬유질과 기름을 뽑아내고 가공하면 이른바 '와인 가죽'이 만들어진다. 이 업체에 따르면 연간 260억L씩 생산되는 와인에서 발생하는 70억㎏의 포도 찌꺼기를 활용하면, 연간 최대 30억㎡의 와인 가죽을 만들 수 있다. 와인 가죽은 지난해 스웨덴 패스트패션 브랜드 H&M의 글로벌 체인지 어워드(환경에 도움이 되는 신소재 개발 콘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해 30만유로(약 4억원)의 개발 자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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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독일 베를린 패션위크 때 펼쳐진 패션 행사 가운데 하나인 ‘그린쇼룸’에 등장한 핸드백과 모델. 그린쇼룸은 친환경·동물 친화적 패션 재료를 고민하는 기업과 소비자가 많이 찾는 행사다. /그린쇼룸 홈페이지
버섯은 겉껍질부터 뿌리까지 활용

버섯 역시 가죽 대체재로 주목받고 있다. 이탈리아의 원단개발업체 'ZGE(Zero Grado Espace)'는 버섯 가죽 '무스킨(Muskin)'을 만든다. 중국이 원산인 대형 버섯의 갓 부분에서 겉껍질을 벗겨내고 가공하면 코르크 빛이 나는 버섯 가죽이 탄생한다. 외양과 감촉은 스웨이드 가죽(무두질한 가죽의 표면을 긁어서 보풀이 일게 한 부드러운 감촉의 가죽)과 흡사하다. 자연 방수 기능도 있어 여러 디자이너가 무스킨으로 신발·가방 등을 만들어 선보이고 있다.

아예 버섯 자체를 '가죽용'으로 키우는 업체도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스타트업 마이코워크스는 버섯 뿌리 부분에 해당하는 균사체를 활용해 패션의류용 가죽부터 벽돌까지 다양한 원자재를 만들고 있다. 버섯의 균사체는 톱밥이나 옥수수 속대 등 음식 부산물을 양분 삼아 성장하는데, 이 같은 환경을 조절해 가죽, 벽돌 등 원하는 강도와 형태의 재료로 만든다. 가죽용으로 키운 버섯을 무두질하면 소·뱀·양가죽과 비슷한 질감과 강도의 가죽이 된다. 또 가구용으로 키운 버섯은 내구성이 강해 사람이 앉아도 형태가 변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생체공학 활용한 인공 거미줄 섬유

최근에는 DNA 편집 기술이 대안 원단 제작에 활용돼 세계 패션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인공 가죽 제작 업체 모던메도(Modern Meadow)는 DNA 편집을 통해 콜라겐을 생성하는 인공 세포를 만든다. 이 세포에서 나온 콜라겐을 결합하면 털을 뽑을 필요도, 무두질할 필요도 없는 가죽이 생산된다. 모던메도는 세콰이어캐피털 등 유명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아 2012년부터 이 기술을 개발해 왔고,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가죽 원단 '조아(Zoa)'를 덧댄 면 셔츠를 만들어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패션은 현대적인가' 전시회에 출품했다.

유전자 복제 기술을 활용해 '인공 거미줄' 섬유 만들기에 도전한 기업도 있다. 미국의 볼트트레즈(Bolt Threads)라는 벤처회사는 가늘고 부드럽지만, 내구성이 강한 거미줄의 활용 방안을 연구했다. 그 결과 거미의 DNA를 복제·변형해 효모에 심고 난 뒤, 거미줄과 같은 성분의 단백질을 뽑아내 '마이크로실크'라는 섬유를 제작하는 방법을 개발해냈다. 아직 대량생산이 불가능해 상용화 단계는 아니지만, 이 업체는 다양한 시제품을 선보이며 시장 반응을 지켜보고 있다.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는 지난해 10월 MoMA의 전시회에 볼트트레즈의 마이크로실크로 만든 황금빛 드레스를 선보였다. 지난해 말에는 자체 제작한 마이크로실크 넥타이,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생산하는 양털과 마이크로실크를 결합해 만든 털모자를 소량 판매하기도 했다. 다른 업체들도 '인공 거미줄'에 주목하고 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는 일본의 신소재 개발 기업 스파이버(Spiber)와 함께, 스포츠웨어 브랜드 아디다스는 독일 기업 암실크(AMSilk)와 함께 인공 거미줄 의류를 개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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