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도 선원도 없는 '無人 선박' 곧 바다 누빈다

입력 2018.03.10 03:06

자율운항 선박 개발 경쟁

날렵한 선체에 뱃머리도 날카로운 군함 한 척이 대서양의 바닷물을 갈랐다. 42m 길이의 이 군함에는 미국 국기가 꽂혀 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타고 있지 않았다. 함장도, 선원도 보이지 않았다. 수백m 떨어진 지상에서 리모컨을 들고 원격조종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 한 명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이 배는 미국의 무인 군함 '시헌터(Sea Hunter)'다. 인공지능(AI)이 스스로 선택하는 항로를 따라 항해하며, 한 번에 최장 3개월 동안 바다 위에 머무를 수 있다. 주 임무는 바다 밑에 있는 잠수함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배는 최근 2년 동안 여러 성능 테스트를 마치고 지난 1월 말 미국 해군으로 인도됐다.

이른바 유령선처럼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배가 스스로 항해하는 '자율운항 선박'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사람이 없는 배(무인선·無人船)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다. 드론(무인비행기)처럼 제작돼 사람이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소형 무인 선박은 바다를 오고 간다. 그렇지만 이들 배는 육지나 대형 선박 인근에서만 작동이 가능해 업무 보조 역할에 그쳤다.

이제는 다르다. 시헌터처럼 사람을 대신해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무인 군함이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인공지능(AI) 기술과 항법위성장치(GPS), 각종 센서 기술 등이 발전한 덕분이다. 민간에서는 사람 없이 짐만 싣고 항구와 항구를 오가는 화물선 개발 경쟁이 한창이다. 사람보다 정확한 AI를 활용하면 해상 사고 발생률과 인건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과 중국 등 선진국이 앞다퉈 무인 선박 시험장을 여는 등 시장 선점에 나선 상황이다.

노르웨이·영국 앞다퉈 개발

가장 개발 경쟁이 뜨거운 지역은 북유럽이다. 노르웨이 앞바다에서는 농업회사 야라와 방산업체 콩스베르크그루펜이 공동 개발하는 화물선 '야라 비르셸란' 시험이 한창이다. 현재 야라가 생산해 트럭으로 운송하는 비료를 자율운항 무인 선박으로 수송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개발에 나섰다. 두 회사는 지난해 11월 선박 디자인을 공개한 뒤, 약 7m 길이의 모형을 제작해 80m 길이의 수조에서 모의 자율운항을 선보였다. 올해 말에는 실제로 건조된 배에 선원 몇 명을 싣고 야라의 화물기지가 있는 포르스그룬에서 인근 항구를 오가는 시범 운항을 앞두고 있다. 내년에는 무선으로 배를 조종하고 제어하는 원격 조종 항해를 성공시키고, 2020년에는 완전 자율운항 단계에 도달해 약 60㎞ 떨어진 라비크 항구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목표다. 노르웨이 정부도 이 선박 건조 비용의 3분의 1가량인 1억3360만크로네(약 183억원)를 투자할 만큼 지원에 적극적이다.

영국의 항공·선박용 엔진 제조업체인 롤스로이스는 구글, 유럽우주기구(ESA) 등과 손잡았다. 첨단 기술을 총동원해 자율운항 선박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구글의 머신러닝 기술을 활용해 선박이 항해 도중 만나는 물체를 인지·분류해 대응하도록 훈련하고, ESA의 통신 기술을 활용해 선박 간 통신시스템도 개발 중이다. 올해 초에는 핀란드 투르쿠(Turku) 지역 바다에 무인 선박 시험장을 열었다. 2020년까지 원격 조종 항해 검증을 마치고, 2025년쯤 완전 자율운항을 시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무섭게 추격하는 중국·일본

후발주자 중국의 공세도 무섭다. 지난해 12월 중국의 소형 무인선 제조업체 윈저우(雲洲)테크, 광둥(廣東)성 주하이(珠海) 정부, 중국선급사(CCS)와 우한(武漢)이공대학은 자율운항 선박 '근두운(筋斗雲)'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윈저우테크는 올해 말 원격 조종 단계를 시험한 뒤 2019년 자율운항 단계에 돌입, 곧장 근두운의 상업 운항을 시작한다는 공격적인 목표를 세우고 있다. 중국 정부도 제조 강국 진입을 목표로 발표한 '중국제조 2025' 계획에 '스마트선박 개발'을 과제로 포함시키는 등 지원에 나섰다. 이달 초 중국은 남중국해 인근 771㎢ 넓이의 해역에 자율운항 선박 시험장인 '완산(萬山) 해양개발시험장' 건설을 시작했다. 106개의 섬이 포함된 이곳은 자율운항 선박 시험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이 일대를 자율운항 선박 시험의 메카로 키운다는 게 중국 정부의 목표다.

일본도 정부가 주도해 2025년까지 250척의 자율운항 화물선을 건조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일본 최대 해운사 니혼유센은 2019년 북미와 일본을 오가는 자율운항 화물선을 시험 운항할 계획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이 국가들보다 뒤처져 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연구원이 지난 2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국내 스마트 자율운항 선박 기술력은 선진국 대비 70~80% 수준으로 추격자 수준이다.

해상 사고·환경오염 줄일 수 있어

각국이 저마다 자율운항 선박 개발에 나서는 것은 이 분야 국제표준을 선점하기 위해서다. 국제해사기구(IMO)는 오는 4월부터 자율운항 선박 도입에 따른 국제법 관련 문제를 논의하고, 5월에 열리는 해사안전위원회(MSC)에서 각종 관련 규정, 기술 표준화 정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자율운항 선박은 사람이 탈 공간을 최소화할 수 있어 일반 선박에 비해 적재 공간이 넓다. 또 현재 개발 중인 자율주행 선박 대부분이 전기가 주요 동력원인 만큼, 각종 오염 물질 배출도 크게 줄일 수 있다. 해상 사고 발생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독일 손해보험회사 알리안츠의 조사 결과,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일어난 1만5000건의 해상 사고 가운데 75%가 사람 실수로 발생했다. 자율운항 선박은 수만 개 센서로 24시간 관리와 제어가 가능해 사고 위험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바다 한가운데서 고장이 날 경우 등 돌발상황 대처 기술은 여전한 숙제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박한선 연구위원은 "자율운항 단계에 이르려면 여러 분야의 기술적 보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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