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방앗간 집 체코 처녀의 수난… 셰익스피어 비극 맞먹는 서민 오페라 걸작

    • 박종호 문화평론가

입력 2018.02.24 03:06

[CEO Opera] <6> 야나체크 '예누파'

'예누파(Jenufa)'는 우리에게는 낯선 체코 오페라다. 체코 오페라가 세계 무대에서 널리 알려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체코 오페라 열풍은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됐고, 지금은 세계 오페라 목록의 중요한 한 축이 됐다. 레오시 야나체크(Janacek·1854~1928)는 그 체코 오페라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작품을 통해 민족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인간 문제들을 그렸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1904년 브르노에서 초연된 '예누파'다.

방앗간을 운영하는 부리야 집안은 과부인 할머니가 집안을 이끌고 있다. 그녀는 두 아들을 두었지만 다 잃고, 장성한 손자 둘과 손녀를 데리고 산다. 슈테바는 큰아들이 낳은 집안의 장손이다. 슈테바는 집안의 상속자라는 생각으로 빈둥거리며 지내는 한량이다. 둘째 라차는 큰아들의 두 번째 아내가 데리고 들어온 양아들이다. 라차는 열심히 일하지만 상속권이 없는 천덕꾸러기다. 손녀인 예누파는 할머니의 둘째 아들이 낳은 딸이다. 예누파의 생모는 일찍 죽고 아버지가 재혼했지만 아버지도 죽었다. 그래서 예누파는 아버지의 둘째 아내가 키웠다. 그녀가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양모(養母)다. 오페라의 원작인 체코 작가 가브리엘라 프레이소바의 희곡 제목도 '그녀의 양모'(1890)다. 방앗간에 시집 온 양모는 아이도 낳지 못한 채 남편을 잃었다. 대신 그녀는 예누파를 친딸처럼 키웠다. 이제 양모는 부리야가에 살지 않고 마을에서 떨어진 교회 관리인 집에서 혼자 산다. 그러면서 교회일도 보고 부리야가에 와서 집안일도 거든다.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다.

"신께서 당신을 보내주셨군요"

예누파는 예쁜 처녀다. 두 손자 슈테바와 라차가 모두 예누파를 좋아한다. 그늘지고 자신감 없는 라차는 속마음을 예누파에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라차가 장난치다가 예누파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만다. 그때부터 그녀는 한쪽 뺨에 칼자국을 새긴 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예누파는 이미 슈테바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예누파가 슈테바에게 "결혼해 달라"고 조르지만, 슈테바의 대답은 "얼굴에 상처 있는 여자와는 살기 싫다"는 말뿐이다.

결국 어느 겨울날 예누파는 양모의 집에 숨어서 아이를 낳는다. 양모가 슈테바를 불러서 출산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슈테바는 "그사이에 촌장의 딸과 약혼했다"며 달아난다. 이번엔 라차가 나타나 예누파의 안부를 묻는다. 이에 양모는 예누파에 대한 라차의 진심을 느끼고, "예누파가 혹시 아이를 낳았어도 결혼하겠느냐?"고 묻는다. 라차는 괴로워하지만 "아이를 제가 키우겠다"고 말한다. 그런 라차의 말에 양모는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녀는 덧붙인다. "그런데 아이는 죽었다."

봄이 되고, 예누파와 라차는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식장 밖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얼었던 개울이 녹자, 갓난아이의 시체가 떠오른 것이다. 양모는 "내가 아이를 죽였다"고 고백하고, 경찰에게 끌려간다. 결혼식은 중단되고 사람들은 떠난다. 무대에는 예누파와 라차만이 남았다. 만신창이된 예누파는 라차에게 말한다. "모두들 가버렸군요…. 당신도 가세요. 저는 재판을 받아야 할 거예요. 저 같은 죄인이 당신과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라차가 대답한다. "세상이 뭐래도 우리 둘은 서로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당신 곁을 지키겠소. 함께할 수만 있다면, 더한 짐도 지겠소." 그런 라차의 얼굴을 예누파는 가만히 바라본다. "라차, 신께서 당신을 보내셨군요. 마침내 신께서 저에게도 미소를 보내주시는군요…." 예누파는 난생처음으로 진짜 사랑을 느낀다.

서민층 고통 대변한 체코 대표작

'예누파'는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부조리를 고발한다. 기득권은 무지와 편협한 이기주의로 횡포를 권리인 양 휘둘렀다. 사랑과 배려를 모르는 전횡으로 점철된 사회는 소외된 자들을 더욱 극한으로 몰고 갔다. 극중의 할머니와 슈테바, 촌장 가족은 기득권을 대표하며, 예누파와 라차와 양모는 소외층이다. 그것이 19세기 말에 나타난 근대화의 그늘이었는데, 이 상황은 지금의 우리 주변에서도 여전히 지속된다. 그래서 '예누파'는 아직도 청중의 가슴을 흔든다.

특히 피날레의 음악은 슬프면서도 대단히 감동적이다. 극적인 면으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수준에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는다. 버려진 인생도 희망은 있고, 최악의 순간에도 혼자가 아니다. 이 오페라는 서유럽의 저명한 명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야나체크가 낳은 체코 최고 오페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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