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B 세계 3위 굴뚝산업 수장이 첨단산업 경연장에 나타난 까닭

입력 2018.02.24 03:06

스타트업 행사장 직접 찾은 ABB그룹 슈피스호퍼 CEO

연매출 37조원, 직원 13만명의 CEO
"대기업에 부족한 아이디어 돌파구는 바로 스타트업"
"韓·獨·日의 경우 로봇 늘어날수록 일자리도 늘어났다"

지난해 12월 독일 베를린에서는 미국 IT(정보기술) 전문 매체 테크크런치가 주최하는 콘퍼런스 '디스럽트 베를린(Disrupt Berlin) 2017'이 열렸다. 주로 스타트업 종사자와 투자자, 대학생들이 대상인 이 행사에 울리히 슈피스호퍼(Spiesshofer·54) ABB그룹 최고경영자(CEO)가 나타났다. 스위스 ABB그룹은 매출 기준으로 미국 GE와 독일 지멘스에 이어 세계 3위 산업설비 제조업체. 굴뚝(brick) 산업 수장이 첨단(click) 산업 경연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스타트업 종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WEEKLY BIZ와 따로 만나 "대기업에도 스타트업과 협력이 매우 중요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울리히 슈피스호퍼 ABB그룹 최고경영자는 현재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인재 확보”라고 꼽았다.
울리히 슈피스호퍼 ABB그룹 최고경영자는 현재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인재 확보”라고 꼽았다. /테크크런치
전력에서 로봇, 스타트업 투자까지

ABB그룹은 1883년 설립된 스웨덴 전력설비회사 ASEA와 1891년 문을 연 스위스 전기회사인 BBC가 지난 1988년 합병해 탄생했다. 두 기업은 유럽 산업화 시기에 가스 터빈, 수력·원자력발전소 건설업 등을 중심으로 성장한 전통 산업 강자들이었다. 이 두 공룡이 힘을 합친 일은 당시 유럽 산업계에선 대단한 화제였다. 이후 ABB는 시대에 따라 핵심 전략을 유연하게 수정하는 방식으로 적응해왔다.

1970년대엔 산업자동화 흐름에 맞춰 산업용 로봇 분야에 진출했다. ABB는 현재 누적 출하 대수 기준으로 세계 3위 로봇 제조업체다. 1978년 처음 산업용 로봇을 출시한 이래 꾸준히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했다. 1998년 여러 개 팔을 이용해 제품을 포장하는 로봇인 플렉스피커(Flexpicker)를 선보였고, 지난 2014년 세계 최초로 인간과 협업하는 로봇인 유미(YuMi)를 공개했다.

ABB는 2000년대 들어 산업자동화용 시스템과 소프트웨어, 인공지능(AI) 등을 기존 사업에 도입하는 데 집중 투자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새롭게 선택한 행보가 스타트업과 공존·상생이다. 슈피스호퍼 CEO는 "스타트업의 최대 강점은 '현존하는 기술을 다양하게 응용하고 결합하는 능력'과 '새로운 기술을 고안하는 능력'"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많은 스타트업이 AI, 3D프린팅, 로봇 공학 등 여러 분야 기술을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응용하고 결합해 새로운 용법을 찾아내기 때문에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협력은 혁신을 위한 '환상적인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은 스타트업과 협업을 통해 '혁신 풀'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좋은 아이디어를 교환하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게 슈피스호퍼 CEO의 분석이다. 스타트업이 대기업에 아이디어와 기술을 보완해주는 대가로 대기업은 풍부한 자금력과 자원을 활용해 스타트업 성장을 돕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는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혁신을 위해서라도 상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디지털 총력전에 스타트업 활용

슈피스호퍼 CEO는 컨설팅회사인 AT커니와 롤랜드버거에서 경영 지식을 쌓고 지난 2005년 전략기획 부문장으로 ABB에 영입됐다. 인수합병(M&A), 공급망 관리, 기술 벤처 펀드 운용 등을 총괄한 다음 산업자동화 부문 사장직을 거쳐 2013년 그룹 전체 CEO 자리에 올랐다. 슈피스호퍼 CEO가 그룹 수장이 된 후 ABB는 기술·지식 중심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해 사내 구조조정과 연구개발(R&D)에 집중하고 있다. 에너지 소비 분석 스타트업인 파워어슈어와 전력 시스템 관련 스타트업인 밸리드어스DC시스템 등을 인수했다. 최근에는 GE의 산업자동화 시스템 사업부를 26억달러에 사들이는 등 주요 사업 부문의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이를 위해 유망한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도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다. 지난 2009년 'ABB기술 벤처(ATV)' 펀드를 설립한 이후 누적 2억달러(약 2170억원)가 넘는 자금을 지원했다.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에 대해 슈피스호퍼 CEO는 "스타트업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을 기술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기술에 (ABB가)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ABB의 주력 사업은 크게 전기 설비, 로봇 공학, 산업 자동화, 전력망 구축 등 4개 부문. 이 때문에 로봇용 소프트웨어, 에너지 효율 향상 기술, 데이터 분석, 사물인터넷(IoT), 3D프린팅, 사이버 보안 등 그룹의 핵심 사업과 연계할 수 있는 분야의 창업 초·중기 기업이 주요 투자 대상이다.

스위스, 영국, 벨기에 등 유럽에서부터 미국, 이스라엘 등 스타트업 창업이 활발한 다른 대륙까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유망한 기업을 찾아내 해당 기업 지분을 최대 20%까지 인수한다. 현재 바이캐리어스·본사이 등 AI 스타트업과 에너발리스·아톰파워 같은 에너지 신기술 기업들을 포함, 14개 스타트업에 투자 중이다. ABB가 지원한 로봇공학·3D프린팅 기술 스타트업인 퍼시몬테크놀로지는 인텔의 스타트업 펀드에서도 투자를 유치했고, 사이버보안 스타트업인 인더스트리얼디펜더는 미국 방산기업인 록히드마틴에 인수됐다.

"로봇과 인간 공존 가능"

ABB의 주요 축인 산업자동화와 로봇 제조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분야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다. 슈피스호퍼 CEO는 4차 산업혁명이 전 세계 경제와 산업 전반에 유례없는 변화를 가져오고, 사회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세계인의 삶의 질이 기술 발달과 함께 개선되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1990년대만 해도 전 세계 인구의 30%는 절대 빈곤선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지만, 현재는 그 비율이 10% 미만으로 줄어들었다는 것. 슈피스호퍼 CEO는 "기업들은 신기술을 활용해 소비자들에게 전보다 더 합리적인 가격에 유용한 제품과 효용가치를 제공할 수 있어서, 장기적으로 보면 4차 산업혁명은 모든 사람이 번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기술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활용하기만 한다면 모두가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봇 산업의 성장과 함께 가장 많이 제기되는 우려는 인간 일자리를 얼마나 빼앗아갈 것인가 문제다. 슈피스호퍼 CEO는 로봇 도입이 늘어나면 고용이 악화될 것이란 의견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고 못 박았다. 이어 "한국, 독일, 일본 등은 근로자 1만명당 로봇 수가 300대 이상인 로봇 도입률 상위권 경제인데, 이 국가들의 실업률은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기술자 혼자 로봇이나 로봇용 프로그램을 설계하기 어렵다"며 "실제 생산시설에서 일했거나 로봇을 활용해 본 근로자의 현장 지식이 이론적 지식을 보완해야 완결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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