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판 혁신 성장', 노동계 동참이 분수령이었다

    • 최선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입력 2018.02.10 03:06

[WEEKLY BIZ를 읽고]

노동계 최대 파벌 금속산업노조 참여
SAP 前사장은 최종 보고서 작성

최선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최선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독일 제조업 혁명인 '인더스트리 4.0(Industrie 4.0)'을 커버 스토리로 다룬 WEEKLY BIZ 1월 27일 자를 읽었다. 독일에 살아본 입장에서 한국의 혁신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몇 자 적어본다.

독일에서 2013년 '인더스트리 4.0'에 관한 최종 보고서를 발표한 인물은 독일 SAP 전 사장 헤니히 카거만(Kagermann)이었다. 그는 "인더스트리 4.0의 기둥은 제조업"이라면서 "연구기관(독일한림원)이 아닌 산업계가 이 프로젝트를 이끌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 내 유력 경제 단체인 독일기계공업연맹, 독일전기전자공업연맹, 독일정보기술통신뉴미디어산업연합회 등 3개 단체가 2013년 4월 공동으로 IoT(사물인터넷) 추진 단체인 '플랫폼 인더스트리 4.0'을 발족시켰다.

이 플랫폼에는 2016년 기준으로 159개 기업·연구소·대학·단체가 참가하고 있다. 독일 최고 연구기관 중 하나인 프라운호퍼연구소, 경영자 단체인 독일산업연맹과 독일연방에너지수도사업연합회 등이 이름을 올렸다. 노동계 최대 파벌 중 하나인 전국금속산업노조도 참가했다. 노사정이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손을 잡은 셈이다.

기업가가 경험 살려 마스터플랜 마련

카거만은 2009년 5월 61세 나이로 SAP를 정년 퇴임하고 독일공학아카데미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당시 "SAP에서 근무한 건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서 "지금부터는 이노베이션이 어떻게 고용 확대와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조언하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카거만은 재계 거물이면서 정계에도 발이 넓어 일종의 산·학·관(産學官) 교량 역할을 맡곤 했던 인물이었다. 결과적으로 인더스트리 4.0을 국가 차원에서 통합 추진하는 데 더 적합한 인사를 찾기 어려울 정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이 인더스트리 4.0을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 혁신 성장을 선도할 수 있었던 데는 카거만 같은 인물의 공이 적지 않지만 단지 한 개인 역량으로 가능했던 사업은 아니었다. 카거만이 마중물이 되긴 했지만 그 기원은 독일 연방정부가 자문기관인 경제과학연구동맹을 창설한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관은 21세기 독일 첨단기술 전략을 정부에 제안하는 목적으로 결성됐다. 독일 과학기술 두뇌들과 더불어 지멘스, 바스프, 다임러, 베링거 인겔하임, 독일철도, 독일우체국 등에서 기술 개발을 담당해 오고 있던 임원들이 참여했다. 기업 담당자를 대거 끌어들인 이유는 이 기관의 목표가 단지 새로운 기술을 과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21세기 이후 독일 경제성장과 연결하는 구체적인 방책을 마련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제과학 연구 동맹에는 독일 노동조합 연맹 부위원장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의미는 남다르다. 독일에서는 노동조합 영향력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노조가 반대하면 신기술 도입은 난항을 겪는다. 연구 동맹이 노사를 함께 모은 것은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진 시대에 고임금·고복지 국가인 독일이 장래 어떻게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고 고용을 확보하면서 국부를 창출할 것인가에 대해 다 같이 주인의식을 갖고 고민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깔려있었다는 얘기다. 카거만은 2010년 이 연구 동맹에 합류했다.

제조 노하우를 소프트웨어로 판다

인더스트리 4.0은 '경제의 디지털화'라는 대서사시의 서막일 뿐이다. 클라이맥스는 '스마트 서비스'다. 카거만이 연방정부에 제출한 인더스트리 4.0 제안서에는 '물건과 서비스의 인터넷'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서비스의 스마트화가 또 다른 핵심이란 주장이다. 즉, "제조 노하우를 소프트웨어로 판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독일 제조업체는 이제는 제품을 수출하거나 외국 공장에서 조립하는 차원을 벗어나 제품의 제조 노하우를 소프트웨어로서 디지털 플랫폼에 올리면서 이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식으로 독일 제조사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제품·부품이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빅데이터를 분석, 능동적으로 고객에게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거만은 이를 '에코 시스템'으로 이름 붙였다. 생태계라는 용어를 차용한 이유는 이 시스템이 생장하면서 가지를 치고 확산해야 한다는 의지를 담았다.

예를 들면 호주 회사가 독일 회사로부터 특정 부품을 빠르게 구입할 필요가 있다고 하자. 이전에는 이 부품을 독일에서 호주로 항공 운송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통관 절차를 밟고 호주 회사 손에 부품이 넘겨지기까진 적어도 수일에서 1주일까지 걸릴 수 있다. 그러나 인더스트리 4.0 시대 에코 시스템에서는 고객은 돈을 내고 디지털 플랫폼에 들어가 독일 기업이 소프트웨어로써 공개하는 제조 노하우를 내려받아 부품을 생산한다. 요구사항에 맞는 사양, 형상, 재질 등을 조사한 다음, 제조 공장에 가서 3D프린터로 부품을 뽑아내면 끝이다. 주문에서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고, 수송비와 화물 보험료, 통관 수수료도 절약할 수 있다.

인더스트리 4.0은 1960~1970년대 일본의 산업정책과 닮은꼴이다. 정부가 나서서 민간 부문을 엮어 국가적 지혜를 모으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과연 독일처럼 치밀하고 짜임새 있는 산업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민관이 함께 고민하고 있는가. 사회 전체가 위기감을 갖고 노동계를 포함한 각계의 대타협과 강력한 추진력이 절실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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