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백 사고 책임 미루다… 파산 피할 두 번의 기회 날렸다

입력 2017.12.30 03:07

日 제조업 사상 최대 규모 도산… 에어백 업체 다카타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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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타 경영진이 2016년 실적 발표회장에서 자사 에어백 사망 사고와 대량 리콜에 대해 사죄하고 있다. 가운데가 다카타 시게히사(高田重久) 다카타 사장. / 재팬타임스
지난 20일 혼다자동차는 올해 7월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자사 차량 운전자 사망 사고가 다카타(Takata) 에어백의 이상 파열 때문이었다고 발표했다. 다카타 에어백 결함에 따른 미국 내 14번째 사망자였다. 14명 중 13명이 혼다 차를 타고 가다 숨졌다. 다카타 사망 사고는 미국에서 2009년 처음 터졌는데, 현재까지 관련 사고로 세계에서 20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다쳤다.

세계 차량 에어백 업계 3위로 시장의 20%를 점유했던 다카타는 2000년 이후 혼다·도요타(렉서스 포함)·닛산(인피니티 포함)·BMW·벤츠 등 20여 업체에 결함 에어백을 납품했다. 세계 리콜 차량은 1억대에 달하며 리콜 비용은 13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6월 다카타는 부채 17조원을 남기고 파산한 뒤 중국 자본에 헐값에 매각됐다. 문제가 처음 터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결함 에어백을 장착한 채 운행되는 차가 아직도 절반이나 된다.

다카타 사태에는 자동차 산업을 비롯해 제조업체들이 안고 있는 공통의 위험과 반면교사의 교훈이 담겨 있다.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제품 결함에 매우 엄격한 美 소비자

일반적 법 원칙에 따르면 가해자의 고의·과실이 입증돼야 불법이 성립된다. 입증 책임은 피해자가 진다. 그러나 미국 제조물책임법에서는 제조자의 고의·과실이 없더라도 소비자가 제조물 결함에 따른 피해에 대해 쉽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조물 특히 자동차처럼 복잡한 제품은 제조사가 정보를 장악하고 있어 소비자가 제조사 잘못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에는 징벌적 배상 제도가 있어서 악질적인 제조사에 거액의 벌금을 물릴 수도 있다.

다카타 사태가 일본이 아닌 미국에서 먼저 터진 것도 이 같은 배경에 기인한다. 2004년 미국에서 혼다 차량 충돌 사고 때 다카타 에어백 이상 폭발 문제가 처음 드러났다. 그러나 이때에는 혼다와 다카타 간의 책임 공방만 오갔을 뿐이었다. 혼다는 2008년에야 미국에서 처음 다카타 에어백 리콜을 실시했다. 그러나 리콜 규모는 몇천대에 지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9년 미국에서 첫 사망 사고가 나오고 다카타 에어백을 장착한 다른 도요타·닛산·BMW 등의 리콜이 이어졌다. 혼다·다카타는 여전히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2014년 뉴욕타임스가 '다카타·혼다가 2004년부터 결함을 알고도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은폐했다'고 보도하며 사태가 폭발했다. 미 도로교통안전국(NHTSA)이 조사에 들어갔고 미 소비자들이 집단 소송을 했다. 하야시 고이치로(林紘一郞) 정보시큐리티대학원대학 교수는 일본 전문지 '비즈니스 로(Business Law) 저널' 기고에서 "다카타 사태의 본질은 제조물 책임에 대한 대응 능력 부재, 소비자에 대한 배려 결여에 있다"고 말했다.

2. 내부 감시와 위기 대응 부재

다카타는 일본 자동차 안전의 상징이었다. 2015년 연 매출 7조2000억원, 종업원 5만여 명의 규모를 자랑했다. 다카타는 1933년 다카타 다케조(高田武三)가 설립한 직물 제조업체에서 출발했다. 6·25전쟁 때 미군에 낙하산용 천을 납품했던 다케조 사장은 미 공군 기지를 찾았다가 조종사 탑승 차량에서 안전벨트를 처음 봤다. 미군 관계자는 "6·25전쟁보다 자동차 사고로 숨지는 조종사가 더 많아 안전벨트를 달았다"고 답했다. 사업 기회를 포착한 그는 1960년 일본 최초 자동차용 안전벨트를 개발한 뒤 혼다를 중심으로 일본 자동차에 안전벨트를 보급시켰다.

창업자 아들로 1974년 2대(代) 사장이 된 주이치로(重一郞)는 혼다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의 조력자였다. 1980년대 혼다는 미국에 본격 진출하면서 다카타에 에어백 개발을 의뢰했고 다카타는 1987년 에어백 양산에 성공했다. 혼다와 다카타는 일본 자동차 입국(立國)의 전사(戰士)이자 끈끈한 동지였다.

그런데 2007년 창업자 3대인 시게히사(重久)가 41세에 사장에 오른 이후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사장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어서 고위 임원들이라도 그의 뜻에 거스르는 주장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썼다. 이사회나 외부의 감독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고 보좌진도 충언을 하면 내쳐졌다. 거래처나 노조도 시게히사 사장의 응원단이나 다름없었다. 다카타는 상장 기업이지만 창업 가문이 지분의 60%를 갖고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폐단은 경영이 순조로울 때는 웅크리고 있다가 위기가 터졌을 때 모습을 드러낸다. 다카타는 2004년 에어백 결함 첫 사고, 2009년 결함에 따른 첫 사망 사고라는 두 번의 결정적인 문제 해결 기회가 있었다. 이때에만 빨리 대처했어도 일본 제조업 최대 도산이라는 참사는 막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장은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2015년 처음 공개 석상에 등장해 잘못을 인정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3. 신기술일수록 책임 분쟁 심해

다카타 사태는 '자동차 회사와 부품업체의 협력 관계가 아무리 끈끈하더라도 신기술 개발이 잘못되면 언제든지 재앙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카타는 2000년쯤부터 에어백 팽창용 화약으로 질산암모늄이라는 신재료를 쓰기 시작했다. 부품을 더 작고 싸게 만들 수 있었지만, 습기가 스며들면 너무 세게 폭발하는 위험이 존재했다. 다카타는 화약이 밀폐 용기 안에 있기 때문에 습기가 스며들 일은 없다고 보고 대량생산을 밀어붙였다. 다카타는 혼다와 오랫동안 특수 관계였기 때문에 신제품 역시 혼다 차량에 많이 사용됐다. 에어백 리콜 차량 대수 1억대 가운데 혼다가 절반을 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다카타 에어백의 제품 자체 또는 조립 과정의 결함 등으로 화약에 습기가 스며들어 이상 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에어백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동차 부품은 자동차 회사와 부품업체가 함께 개발하며 자동차 회사의 최종 승인을 거쳐 차량에 탑재된다. 따라서 자동차 회사도 부품 결함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감독 책임'이 크다. 그러나 다카타 사태의 경우 부품업체만 책임을 떠안고 도산했다.

이는 신기술 개발의 위험 부담을 누가 질 것인가에 대해 숙제를 안겼다. 해결하지 못하면 제2의 다카타 사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일본 자동차산업 조사 업체 포인(Fourin)은 "자율 주행, 커넥티드카, 전기차(배터리·제어) 등에서 자동차 회사와 부품·개발사 간 관계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며 "결함 사고 발생 시 업체 간의 책임 공방이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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