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장사하는 대신 자릿세 받자" 초호화 부동산 임대업 변신한 백화점

입력 2017.12.02 03:03

도쿄 긴자 최대 복합 상가 긴자식스
10개 이상 백화점 1년 반동안 폐점 속 새 수익모델로 주가 2년만에 최고
6성급 호텔처럼 미술관처럼 명품 패션·잡화에서 극장·공중정원까지 체험 공간 탈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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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자식스는 고급스러운 패션·라이프스타일 매장뿐 아니라 미술품이나 문화·여가 공간의 내용·배치를 세심하게 설계했다. 고객이 긴자식스를 삶의 일부로 여기도록 만들어 머무는 시간과 재방문을 늘리기 위해서다. 긴자식스 전경/최원석 차장
금요일 오후 긴자(銀座) 중앙로는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절반은 외국인이었다. 지하철 긴자역에서 중앙로를 따라 신바시(新橋)역을 향해 5분쯤 걸었더니 왼쪽에 황금색과 은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직사각형 건물이 보였다. 긴자식스(Ginza Six)였다. 옛 마쓰자카야(松坂屋)백화점 긴자점(店)을 헐고 새로 지어 올 4월에 문 연 긴자 최대 규모의 복합 상가다. 13층 56m 높이에 쇼핑몰 공간은 지하 2층부터 지상 6층이고 그 위쪽은 사무실이다. 연면적은 14만8700㎡(4만5000평). 쇼핑몰 공간에는 패션 상품부터 생활 잡화 매장, 레스토랑·서점까지 240여 고급 가게가 밀집해 있다.

건물 밖에서 만난 스즈키 구미코 긴자식스 홍보 담당을 따라 내부를 둘러봤다. 240여 매장 중 절반이 플래그십 스토어(기간점)라고 했다. 구미코 홍보 담당은 "긴자식스라는 이름은 긴자 '6가'에 위치한 동시에 '6성(星)급' 호텔의 만족감을 주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긴자식스가 주목받는 것은 규모나 화려함 때문만이 아니다. 위기에 빠진 백화점 업계를 구할 새 수익 모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효용은 문 연 지 반 년이 지나면서 증명되고 있다. 긴자식스의 모기업이자 일본 백화점업계 2위인 J프런트리테일링의 주가는 2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J프런트리테일링은 최근엔 내년 2월기 실적 전망을 발표하면서, 순이익을 전년보다 5% 늘어난 285억엔(약 2850억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종래 예상은 전년보다 2% 감소한 265억엔이었다. 영업이익은 17% 늘어난 490억엔으로 전망했다. 다이와증권은 최근 J프런트리테일링 목표 주가를 10% 이상 올렸다.

멸종을 앞둔 공룡 취급을 받는 일본 백화점 대기업으로는 눈에 띄는 성과다. 일본 백화점협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1~6월) 일본 백화점 업계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0.3% 줄었다. 작년 일본 백화점 매출은 5조9780억엔(약 60조원)으로 36년 만에 6조엔대가 무너졌다. 2016년 이후 1년 반 동안 10곳이 넘는 백화점이 문 닫았다. 반면 긴자식스는 4월 개업 이후 8월까지 4개월 남짓 기간에 방문 고객이 700만명을 넘어섰다. 연간 목표 2000만명도 충분히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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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내부에 설치된 일본 대표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 미술관처럼 꾸민 서점인 쓰타야 긴자점, 카메라 판매점과 사진 화랑을 겸한 ‘라이카’ 카메라 매장./최원석 차장
백화점 버리고 임대업으로 승부

긴자식스는 기존 백화점 수익 모델을 송두리째 바꿨다. 기존 백화점처럼 상품을 사들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상점을 유치해 임대료 수입을 얻는다. 탈(脫)백화점으로 살아남겠다는 J프런트리테일링 야마모토 료이치(山本良一) 사장은 "백화점은 지금 대전환기에 있다"며 "지금까지 50년 동안 해왔던 백화점 비즈니스 모델은 앞으로 통용되지 않을지 모른다"고 했다. 일본 백화점 대기업인 다이마루(大丸)와 마쓰자카야가 합병해 2007년 출범한 J프런트리테일링은 이후 자사 백화점 안에 과감히 외부 임차인을 유치하는 식으로 인건비와 몸집을 줄이고 변화에 대응이 빠른 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본업인 백화점 비중을 줄이고 그만큼을 매장 임대 사업으로 바꿔 안정적 수익을 얻겠다는 전략이다.

J프런트리테일링이 지난 10년간 축적한 전략의 집약체가 긴자식스다. 모리(森)빌딩·루이비통그룹(LVMH)·스미토모(住友)상사 등을 파트너로 끌어들여, 건물 개발부터 매장 관리·운영의 리스크는 분산하고 운영 효율은 극대화했다. 부동산 회사 모리빌딩은 2004년 거대 주상 복합 타운인 롯폰기(六本木)힐스 프로젝트가 성공하면서 한때 쇠락했던 롯폰기 지역 자체의 이미지를 끌어올렸을 만큼 재개발·도시기획에 뛰어나다. 특히 예술작품을 활용해 건물 가치를 높이는 데 탁월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또 루이비통그룹이 명품 소비자를 어떻게 사로잡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건물 내외관 디자인과 매장 운영에 전부 담았다.

비슷한 모델은 일본 백화점 업계 전체로 확산 중이다. 업계 3위 다카시마야(高島屋)도 임대업 확대로 실적이 호전되고 있다. 반면 업계 1위 미쓰코시이세탄(三越伊勢丹)홀딩스는 백화점 매출 비율이 88%나 될 만큼 본업 중심이다. 그러나 내년 3월기 순이익 전망치를 전년보다 33% 낮추는 등 상황이 좋지 않다. 업계 1위이기 때문에 사업 모델 변신보다 본업을 더 잘하는 쪽에만 집중했다가, 고객의 백화점 이탈이 늘면서 큰 타격을 입고 있다는 분석이다.

모노(物·물건) 소비→고토(事·체험) 소비

긴자식스는 업의 본질이 부동산 임대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임대료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임대료를 높이려면 매장에 더 많은 손님이 그리고 꾸준하게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소비자가 '모노(物·물건) 소비'에서 그치지 않고 '고토(事·무형의 즐거움과 체험) 소비'를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토 소비는 최근 일본 소매업계가 온 힘을 쏟는 분야다.

변신하는 도쿄 긴자
긴자식스는 매장만 묶어 놓은 게 아니라 공간 전체가 고객에게 종합적 만족을 주도록 설계됐다. 2층에서 5층까지는 중앙 부분이 아래위로 뚫려 있는데 20m 높이 천장에는 거대한 호박 모양 풍선 10여 개가 매달려 있다. 일본 설치미술가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의 작품이다. 지하 1층부터 5층까지는 상가, 지하 2층과 지상 6층, 맨 꼭대기인 13층은 카페·베이커리·레스토랑이다. 6층엔 현대미술관에 온 것 같은 최신식 분위기의 서점인 쓰타야 긴자점이 있다. 2300㎡(700평) 면적의 거대 공간에 책 자체가 마치 예술품처럼 진열돼 있다. 지하 3층엔 일본 전통 연극인 노(能) 전용 극장이 있는데, 현대적 건물 안에 일본 전통 집을 집어넣은 느낌이다. 7층부터 12층은 사무실 공간이다. 옥상에는 공중 정원과 카페·바가 있어 작은 숲 사이로 도쿄타워가 보이는 멋진 야경을 즐길 수 있다.

긴자식스가 교외에 매장을 집결시킨 쇼핑몰이나 지하·저층에 식당가를 모아놓은 도심 오피스 빌딩의 임대료 수익 모델과 비슷한 것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집결시켰는가에 있다. 비슷한 커피숍처럼 보이는데 한국에서 스타벅스만 잘나가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긴자식스는 교외가 아니라 일본에서 가장 비싼 땅에 지어졌다. 그리고 마음 먹고 한번 차 타고 나가 쇼핑을 즐기거나 음식점에 가기 위해서만 들르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반복해서 즐기는 공간이 되도록 꾸몄다. 고객에게 긴자식스가 새로운 집처럼 느껴지도록 패션매장·레스토랑뿐 아니라, 예술작품과 세련된 문화·여가·휴식 공간을 세심하게 배치했다.

이런 노력은 매장을 찾는 고객에게만 향한 게 아니다. 건물 내부는 매장주가 매장 레이아웃을 바꾸거나 새 매장이 들어설 때에 변경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블록 구조로 세심하게 설계했다. 사무실 입주자들은 긴자식스가 삶의 질을 높이는 기반이다. 긴자식스의 사토 미치토 프로모션 담당은 "긴자식스의 모토는 최상의 삶(life at its best)"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최상의 삶을 추구하려고 할 때 긴자식스가 그 '삶의 일부'가 되겠다는 것이다.

올림픽 앞두고 긴자 상점들 재개발 붐

긴자는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여전히 재개발 중이다. 작년 3월 '도큐(東急)플라자 긴자', 9월 '긴자 플레이스'가 새로 문을 열어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 3월엔 여성용 백화점 '프렝탕 긴자'가 매장을 일신하고 면세 코너를 강화한 '마로니에 게이트 긴자'로 변신했다. 긴자 명물인 소니 빌딩은 잠정 폐관하고 2020년에 음악·스포츠 이벤트 전문의 '긴자 소니 파크'로 새로 문을 연다.

긴자는 긴자식스 등 대형 재개발, 방일(訪日) 외국인 관광객 수요를 염두에 둔 상업 시설 개발 덕택에 땅값이 상승하고 있다. 지난 7월 일본 국세청 발표에 따르면 32년 연속 전국 지가 1위인 긴자 5가는 1㎡당 가격이 4032만엔(약 4억원)으로 과거 최고였던 버블 직후 1992년 3650만엔을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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