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소리를 들어라… 그에 어울리게 연주하라

입력 2017.11.18 03:03

[오케스트라 리더십] 〈2〉 클라우디오 아바도

2003년 8월 스위스 루체른의 KKL루체른문화컨벤션센터 콘서트홀. 평상복 차림의 오케스트라 단원 앞에 위암과 싸우느라 병색이 완연한 일흔 살 지휘자가 악보를 들고 나와 앉는다. 데님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지휘봉을 든다. 연습곡은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 지휘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단원들이 만들어가는 음악을 눈빛과 손짓으로 이어가고, 가끔 연주를 중단하고선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들으세요. 서로의 소리를 들으세요." 권위와 카리스마 대신 평생 경청(傾聽)의 힘을 강조했던 명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Abbado·1933~2014)의 리허설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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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결성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연습하고 있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아바도가 함께 연주했던 사람들을 손수 불러 모아 꾸린 ‘드림팀’이었다. 아바도는 “서로를 바라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피터 피쉴리·루체른페스티벌
아바도는 젊은 시절부터 '진보적'이란 평을 듣던 지휘자였다. 밀라노 라 스칼라, 빈 국립오페라단 음악 감독으로 일하며 고전뿐 아니라 현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그리고 1989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당시 베를린필은 "내 머릿속에 있는 음색을 구현하라"는 카라얀의 제왕적 리더십에 33년 동안 길들여졌던 오케스트라였다. 그러나 아바도는 취임 일성부터 달랐다. 아바도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나는 오케스트라의 1인자가 아니라, 함께 일하는 음악가"라고 했다.

"들으세요, 서로의 소리를 들으세요"

베를린필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호칭을 바꾼 것이다. 자신을 '마에스트로'라고 부르는 단원들에게 "나를 부를 때는 '클라우디오'로 불러 달라"고 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즐겼던 카라얀과 달리 아바도는 조용하고 수줍음을 탔다. 다양한 문학과 예술을 섭렵하면서도 단원들에게 자신의 해석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단원들에게 어느 정도 템포로 연주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물어보며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했다. 질문을 용납하지 않던 카라얀과는 정반대 스타일이었다.

클라우디모 아바도
아바도는 "오케스트라는 확대된 실내악(chamber music)"이라고 즐겨 말했다. 주역 한두 사람이 이끌어 가는 음악이 아니라, 연주자 누구나 한 번씩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함께 엮어 나가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지휘자의 명확한 방향 제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연주하는 데 익숙했던 베를린필이 곧장 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길어지는 토론과 지휘자의 질문에 단원들이 반발한 사실이 일간지에 보도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베를린필은 그의 재임 기간을 거치며 서서히 변화했다. '모든 소리가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카라얀의 통제 아래 구축했던 화려한 음색은 담백해졌고, 소화하는 레퍼토리는 더 넓어졌다.

아바도의 음악 철학의 중심에는 '경청'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알프스 마터호른을 산책하면서 '눈이 내리고 사라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완전한 침묵에 잠기는 경험을 했다'고 회상하곤 했다. 젊은 날 실내악에 심취하기도 했던 아바도는 소리와 소리 사이의 여백, 음악이 끝난 뒤 울림이 사라지기까지의 침묵을 중시했다. "많은 사람이 말하는 법을 공부하지만, 어떻게 해야 잘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않는다. 서로의 소리를 듣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음악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 들을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물론 아바도가 보여준 경청의 리더십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우선 혼자서도 음악을 해석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연주자를 모아야 했고, 이들이 같은 목표를 이루려는 열정으로 뭉쳐야 했다. 그리고 지휘자가 이들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고 올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다는 신뢰를 얻어야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바도 최고의 연주는 그가 2003년 8월부터 조직해 지휘한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의 연주에서 나왔다. 아바도가 자신과 함께 연주했던 연주자들을 손수 뽑아 소집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수석 단원과 솔리스트들로 구성한 '올스타' 오케스트라다. 이들이 기꺼이 모여든 것은 다양한 소리와 음악을 쉴 새 없이 탐구하고 열정을 바쳤던 아바도의 실력에 대한 두터운 신뢰 덕분이었다.

연주자들 화합 유도한 경청의 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아바도와 함께 연주한 오보에 연주자 알브레히트 마이어는 2006년 아바도의 음악을 다룬 다큐멘터리 '침묵의 소리를 듣다(Hearing the Silence)'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아바도는 절대로 '오보에 소리를 더 내라, 줄여라, 트럼펫 소리를 더 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딱 한 마디, '들으라'는 말뿐이다. '플루트 주자가 솔로 파트를 해석하는 방식을 듣고, 그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연주하라, 매번 내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베를린필 악장을 지내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도 악장을 맡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콜야 블라허는 "아바도는 연주자들의 제안에 늘 주의를 기울였고, 그 제안을 수용해 음악의 논리적 흐름을 하나로 연결하는 데에 누구보다 뛰어났다"고 했다. 단원들의 해석을 존중하고 서로의 소리를 듣도록 이끄는 거장의 지휘 아래, 연주자들은 저마다 원하는 대로 연주하면서도 함께 최고의 음악을 만드는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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