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디즈니, 넷플릭스에 선전포고… 무기는 블록버스터 콘텐츠

입력 2017.11.18 03:03

인터넷 동영상 채널 진출 선언한 밥 아이거 월트디즈니 CEO
계열사 최고 매출처 ESPN 유료 시청자 1년 만에 3.5% 줄어
영화·드라마 콘텐츠 넷플릭스에 공급 중단 연 6130억원 수익 포기
2005년 이후 줄곧 콘텐츠 관련 M&A

지난 6월 말 미국 플로리다 월트디즈니 본사. 밥 아이거 최고경영자(CEO)는 이사회 집행부와 주요 계열사 간부를 불러 모아 이틀 동안 끝장 토론을 벌였다. 토론 주제는 단 한 가지, '디지털 기술 발달에 따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토론 도중 디즈니가 소유한 방송사의 유료 시청자 수가 뚝뚝 떨어지는 그래프가 등장하자, 회의장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라톤 회의 끝에 아이거는 두 가지 결단을 내렸다. "디즈니도 실리콘밸리 기업처럼 시청자가 사용하기 편리한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채널을 만들겠다. 그리고 인터넷 스트리밍 사업자 넷플릭스에는 영화·드라마 공급을 중단하겠다."

한 달 후 아이거가 실적발표장에서 이 계획을 공식 발표하자 미디어업계는 '파격적'이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넷플릭스와의 계약 중단으로 당장 내년에만 최소 5억5000만달러(약 6130억원·모건스탠리 추정치)의 배급 수익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용 동영상 서비스를 만들려면 추가 개발·마케팅 비용 수십억달러가 필요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무엇보다 시청자 1억명을 거느린 세계 최대 플랫폼 넷플릭스와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걷겠다는 그의 굳은 결심이 주목을 받았다. 아이거의 결단은 미디어업계의 메기로 급부상한 넷플릭스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을까.

넷플릭스 부상에 디즈니는 위기감

디즈니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는 단어는 '코드 커팅(cord cutting·케이블 선을 자른다는 의미)'이다. 넷플릭스 등 인터넷으로 영화·드라마를 보는 시청자가 늘어나면서 반대로 지상파·케이블·위성 TV 시청자가 감소하는 현상을 미국 미디어업계에선 이렇게 표현한다. 대다수 가정의 초고속 인터넷 속도가 고화질 동영상을 보는 데 무리가 없어질 정도로 빨라진 2011년 무렵부터 등장한 말이다.

디즈니가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배급하는 방식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년 전 디즈니 영국지사는 영국인만을 대상으로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라이프'를 시범 출시했다. 그러나 정기 시청료를 매월 15달러로 매겨 넷플릭스(10달러)보다 훨씬 비쌌다. 신규 고객을 불러 모을 신작 영화나 인기 드라마도 '디즈니라이프'엔 싣지 않았다. 사용하기도 불편해 정기 유료 회원이 43만명에 불과하다. 전사적인 역량을 쏟아부어도 눈길을 끌기 어려운 마당에, 이런 소극적 시도는 시청자나 업계의 관심을 끌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거가 디지털 분야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기존 지상파·케이블·위성TV 사업이 비교적 건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올해 케이블·위성TV 사업 부문의 예상 수익은 240억달러로, 그룹 전체 수익의 40% 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케이블·위성TV 시청자 수가 매년 뚝뚝 떨어지고 있어, 디즈니 내부에선 아이거 회장의 결단이 '이미 늦은 것 아니냐'는 위기감 역시 팽배하다. 넷플릭스 등 실리콘밸리 기업이 자체 영화·드라마 제작에 수억달러를 투입하면서, 기존 디즈니 시청자의 이탈 속도는 최근 더 빨라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디즈니 계열사 중 최고 매출처인 ESPN은 지난 6월 말 기준 유료 시청자 수가 1년 전보다 3.5% 줄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엔 전년 대비 2% 감소했는데, 올 들어 감소 폭이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이다.

독자 인터넷배급망 추진… 난관 많아

아이거의 궁극적 목표는 디즈니가 제작한 영화·드라마를 시청자에게 직접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넷플릭스나 케이블TV 회사 등에 콘텐츠를 공급한 대가를 받아 수익을 거뒀는데, 앞으론 소비자에게 직접 시청료를 받겠다는 구상이다.

밥 아이거 vs 리드 헤이스팅스
핵심 고객층 이탈을 막기 위해 아이거는 구체적인 일정표도 제시했다. 당장 내년 초까지 ESPN의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를 출시하고, 2019년엔 픽사 등 주요 디즈니 계열 제작사의 영화 신작도 인터넷으로 상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넷플릭스에 결별을 통보하는 동시에 넷플릭스 시청자를 뺏어 올 서비스를 내놓겠다는 계획이다.

'소비자에게 동영상을 직접 공급하겠다'는 아이거의 야심을 구현해 줄 핵심 조직은 뱀테크(BAMTech)라 불리는 동영상 전문 스타트업이다. 2015년 미국 메이저리그(MLB)의 사내 벤처로 출발해 스포츠 중계 앱을 개발했던 조직인데, 아이거 회장은 지난해 이 회사에 10억달러를 투자했다. 올해는 아예 15억8000만달러를 더 투자해 지분율을 75%까지 끌어올려 자회사로 만들었다. 디즈니 내부 역량만으로는 넷플릭스처럼 사용자가 편리하게 사용할 동영상 서비스를 만들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넷플릭스에 맞설 인터넷 플랫폼이 간절했던 아이거는 한때 트위터 인수까지 검토했으나, 현 단계에선 뱀테크에 스트리밍 서비스 개발을 위임해 자체 플랫폼 구축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만으로는 디즈니가 디지털 공간에서 당장 넷플릭스를 앞지르기엔 무리라는 분석이 아직은 많다. 스트리밍 시장에선 후발주자인 데다, 디지털 부문 개발 역량도 넷플릭스에 뒤처지기 때문이다. 상당수 리서치 기관은 디즈니가 새로 출시할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의 구독자 수가 2020년에도 500만명 미만일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는 현재 넷플릭스 구독자의 20분의 1 수준이다.

"콘텐츠로 승부"… 21세기폭스 인수 시도

아이거가 최근 눈독을 들인 또 다른 회사는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회장이 소유한 영화사 21세기폭스다. 지난달쯤 21세기폭스의 제작 부서를 대부분 사고 싶다는 제안을 내놨는데 머독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상황이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아이거의 인수 구애를 "블록버스터 콘텐츠를 확보해 디지털 공간에서 넷플릭스를 무찌르겠다는 의지"라고 해석한다.

아이거는 2005년 CEO 취임 이후 줄곧 대형 인수·합병(M&A)을 성사시켜 그룹 전체의 콘텐츠 제작 역량을 높이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2006년 픽사를 인수한 데 이어, 마블엔터테인먼트(2009년), 루카스필름(2012년)을 사들인 게 대표적이다. 전 세계 수천만명의 관객을 매료시킨 블록버스터 콘텐츠야말로 디즈니를 90년 넘게 성장 가도로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콘텐츠 제작 역량은 미국 내에서도 압도적이라 매출 역시 글로벌 금융위기 이듬해인 2009년 이후 매년 20억~30억달러씩 성장 중이다. 특히 인수·합병 이후에 각 제작 스튜디오를 사일로(silo)처럼 방치하지 않고, 피인수자의 강점을 흡수한다. 예를 들어 전통 제작 스튜디오인 디즈니애니메이션은 픽사가 가진 현장·토론 중심 문화를 흡수해 '겨울왕국' '모아나' 등 종전과는 다른 성격의 히트작을 연달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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